고3 때 <어린 왕자>를 읽었다. 파란색 배경에 멍청하게 생긴 어린 왕자가 망토를 쓴 채 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표지였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라 읽을 염두가 나지 않는 소설이었다. 입시 스트레스로 인해 적극적으로 딴짓에 몰두하던 시기가 아니었다면 평생 읽을 일 없었을 것이다.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어린 왕자>는 순수한 동심을 가진 어린 왕자가 지구에 와 여우의 가르침을 받고 장미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는 이야기로 알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린 왕자'보다 '주인공'에게 더 관심이 갔다.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비행기 조종사가 된 주인공. 그는 사막에서 아이의 모습을 간직한 어린 왕자를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어린 왕자의 부탁으로 오랜만에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 때 심정은 어땠을까. 인터넷에 어린 왕자에 대한 정보를 아무리 찾아봐도 모두 어린 왕자에 대한 얘기만 할 뿐, 주인공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삶은 아무런 동의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다. 그리고는 축복된 삶을 소중히 살아가길 강요받는다. 우리는 어른의 바람 혹은 강요에 못 이겨 열심히 삶을 살아가다 어느 순간 어른이 되어버린다.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는 어린 왕자와 같은 순수한 동심은 과거에 내다버리고 온다.
그 '동심'이라는 녀석은 어릴 적 우리의 모습을 하고 있다. 녀석은 과거 속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어른이 된 우리는 가끔씩 외로워질 때면 추억 회상을 빌미로 울고 있는 녀석을 만나러 간다. 하지만 만남의 기쁨도 잠시, 우리는 회상을 멈추고 곧바로 현실로 되돌아간다. 남겨진 녀석의 슬픔은 알지 못한 채.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만의 어린 왕자를 과거에 유기하는 행위다. 영원히 변치 않을 어린 왕자는 영원히 어른이 된 나를 기다린다. 그래서 이따금 슬픔을 느낀다. 시간이 흐르기에 나는 떠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