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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Mar 25. 2024

팥빙수와 제빙기

중학생 시절이 끝나갔다.


 태양이 머리 위를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정수리에 계란을 톡 까면 후라이가 익을 것 같은 날씨였다. 이런 날에는 하나로마트에 가서, 카트에 우유와 단팥과 떡과 젤리와 초코 시럽과 후르츠 칵테일을 마구 담는다.




 중학생 때 아파트 앞에 커다란 생활용품마트가 생겼다. 그 마트에 구경 갔다가 특이한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맷돌 손잡이가 달려 있는 커다란 머리에 C자로 굽은 등허리를 가진 놈이었다. 팥빙수 기계! 우리는 홀린 듯이 그놈을 집어 들었다.


제빙기. 5000원으로 기억한다.


 얼음틀에 우유를 붓고, 냉동실에 넣어 반나절 기다린다. 꽝꽝 언 얼음틀을 식탁에 내려쳐 하얀색 정육면체를 꺼내, 제빙기 뚜껑을 열어 쏟는다. 받침대에 그릇을 두고 손잡이를 돌리면 흰 눈이 쌓인다. 수북이 쌓인 얼음가루 위에 숟가락으로 단팥을 뭉텅 뜨고, 젤리와 떡을 탈탈 털고, 후르츠 칵테일을 쏟아붓고, 초코 시럽을 교차해서 뿌린다. 그리하면 특제 수제 팥빙수 완성이다.


팥빙수. 이제는 먹을 수 없다.


 우리는 숟가락을 빙수에 꽂아 퍼먹었다. 입에 넣을 때마다 짜릿하고 사늘한 기운이 돌았다. 설탕을 잔뜩 때려 넣은 팥과 시럽에서 새어 나오는 단맛과 알록달록한 떡이 어금니 사이에서 으깨지는 식감이 후속타를 넣었다. 에어컨을 빠방하게 틀고 거실에 둘러앉아 팥빙수를 먹으면 더위는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는 팥빙수에 푹 빠졌다. 평소에는 제빙기를 부엌장에 고이 모셔두었다가, 여름만 오면 잠들어 있던 제빙기를 꺼내 먼지를 털었다. 냉동실에 얼음틀 두 개가 교대로 항상 우유를 얼렸고, 냉장고 맨 아래칸에는 팥 떡 젤리 시럽 후르츠 칵테일이 자리를 지켰다. 특수부대 같이 든든한 자태에 여름을 버틸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설빙이 전국적으로 히트를 치고, 동네 카페에서도 빙수를 팔기 시작했다. 그러자 더이상 ‘팥빙수’라는 단어는 보기 힘들어졌다. 사람들은 거추장스럽다는 듯 앞에 붙은 ‘팥’을 가차 없이 떼버렸다. 빙수 가게에 가면 팥빙수는 메뉴판 구석탱이에 쓸쓸히 쭈그려 있다. 팥빙수를 먹자는 친구는 한 명도 없다. 모두 초코 빙수, 인절미 빙수, 멜론 빙수를 가리킨다.


 오랜만에 부엌장을 열어 제빙기를 찾았다. 제빙기는 온데간데없었다. 계절 내내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제빙기의 자리는 명절 선물 세트 식용유 여러 개가 나란히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꿇어앉은 채 멍하니 부엌장 안을 바라보다가 문을 닫았다. 이제 얼음틀을 쓸 일은 없겠군. 플라스틱 얼음틀은 군데군데 검은색 얼룩이 끼어 있었다. 얼틀을 버렸다. 중학생 시절이 끝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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