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비단 Mar 26. 2024

기숙사와 새끼고양이

아무 걱정도 미련도 없이 추억할 수 있을까


 ‘기숙사’라는 단어에는 가슴을 뛰게 하는 묘한 마법이 있다. 청소년기 아이들이 집을 떠나 자리하게 되는 곳이어서 그럴까. 아니면 해리포터를 너무 열심히 봐서 그럴까. 나도 기숙사에 입사하면 똥 씹은 표정을 한 말하는 모자가 내 방을 배정해줄까. 나는 래번클로가 좋은데.


사실 해리포터 본 적 없다




 나는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친구들이 가장 많이 진학하는 옆동네 고등학교는 갈 생각이 없었다. 입시설명회 때 그 학교 교감이 우리 학교에 와서 설명을 하는 중에 책상에 엎드려 퍼질러 자다가 찍혔기 때문이다. 그 교감은 내 이름을 물으며 어느 고등학교에 갈지 두고 보겠다고 했다. 뭐래. 나는 패딩을 더욱 여매고 꿀잠을 때렸다.


 나는 기숙사를 고집했다. 집을 떠나고 싶었다. 고등학교 기숙사는 그 꿈을 실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부모님은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는지 바로 허락했다. 그렇게 내 기숙사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학교 입구에 5층 짜리 기숙사 건물이 떡하니 놓여 있다. 1층은 탁구대가 있고, 2층과 3층은 남자, 4층과 5층은 여자가 사용하는 구조였다. 나는 2층 첫 번째 방에 배정받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양옆에 화장실이 있고, 옷장 4개와 이층침대 2개가 양쪽 벽에 붙어 있었다. 나는 오른쪽 2층에 자리 잡았다. 우리 방에 1학년은 나 혼자였다.


 우리는 3층 자습실에 집합했다. 개학 전날 진행하는 신입생 환영회였다. 사감 선생님이 대충 기숙사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을 설명하고, 나머지는 선배들에게 맡겼다.


 남자애들이 자습실 입구에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선배들은 의자 위에 올라서서 우! 우! 침팬지 소리를 내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1학년들은 한 명씩 무대에 서서 자기소개를 했다. 장기자랑을 하고 싶은 친구는 해도 된다고 선배들이 소리쳤다. 한 친구가 정치인 성대모사 메들리를 선보였다. 모두가 열광하며 폭소를 터뜨렸다. 그 친구는 1년 후 전교회장이 되었다. 정계진출의 꿈을 가진 친구 같던데 미리 싸인이라도 받아둘 걸 그랬다.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일어난 여야대통합




 하루 이틀 정도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대화하는 시간을 갖고, 3일 차쯤부터 분위기가 사그라들었다. 점차 자습실에는 공부하는 분위기가 잡혔다. 자습실은 일인용 책상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칸막이가 옆자리 사람을 가렸다. 그런 폐쇄적인 공부 자리는 처음이었다. 내 자리는 자습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칸막이에 갖가지 낙서가 쓰여 있었다. ㅇㅇㅇ 개새끼, 섹스, 시발 졸리다…. 이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영혼이 희생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습 시간은 7시부터 9시, 10시부터 12시까지 총 4시간이었다. 밤 11시쯤 되면 슬금슬금 사람들이 자습실을 빠져나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었다. 나는 아는 사람도 없고 딱히 친해지고 싶은 사람도 없어서 12시까지 자습실 자리를 지켰다. 친구들이 처음에 공부 엄청 열심히 하는 친구인 줄 알았다고, 그래서 말 걸기 무서웠다고 한다.


 친구들 얼굴과 이름을 외우는 데 1년이 걸렸다. 원래 타인에게 관심이 없어서 얼굴과 이름, 목소리를 지지리도 못 외우는 인간이다. 그래서 1년 동안 동기에게 꾸벅 인사를 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야, 나도 1학년이야.”하며 나를 나무랐다. 아직도 나를 못 외웠냐는 표정과 함께. 나는 언젠간 외우겠지 하는 생각으로, 기숙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죄다 인사했다. 이 사람이 동기인지 선배인지 후배인지 기억 못 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자명종 소리에 잠을 깨고, 졸린 눈으로 사다리를 내려와 세수를 하고, 설렁설렁 교복을 입은 다음, 1층에 모여 친구들을 기다린 후 우르르 모여 급식실에 갔다. 학교가 끝나면 하나 둘 기숙사에 모여 얘기를 하다가 자습을 하고, 밤이 되면 한 방에 모여 놀거나 휴게실에서 컵라면을 먹거나 치킨을 시켜 먹었다. 3년 동안의 기숙사 생활은 나름 괜찮았다.


난 10시 이후에는 야식 잘 안 먹었다.




 입사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어느 날이었다. 방에 들어오니 선배들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 가운데 웬 새끼 고양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리 방 2학년 형이 주워온 모양이었다. 나는 입사 선물로 받은 담요로 고양이를 감쌌다. 입사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퇴사 위기에 처해 불안해하는 나는 신경도 안 쓰고 선배들은 고양이를 구경했다. 그 녀석은 경계심이라곤 전혀 없는 순진한 눈빛으로 기숙사 바닥을 총총 기어 다녔다.


 다음 날 새끼 고양이는 사라졌다. 아마 형이 밖으로 몰래 데려나간 거겠지. 그 녀석은 고작 하룻밤을 지낸 이곳을 그리워할까? 기억하기는 할까? 기숙사에 갑작스레 들어와 훌쩍 떠나버린 녀석을 보며 언젠가 내가 기숙사를 떠날 날을 생각했다. 그때 나는 아무 걱정도 미련도 없이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이 기숙사를 추억이나 할 수는 있을까.









구독, 라이킷, 댓글, 응원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이전 글

https://brunch.co.kr/@bidancheon/69


다음 글

https://brunch.co.kr/@bidancheon/71



이전 16화 팥빙수와 제빙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