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할래?"

*삼겹살 :서촌 대하식당

by HERMITAGE

IMG_7447.JPG

정육점에 들른다. 이제야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핑크빛 조명 아래서 눈높이보다 훨씬 위에 올려진 은쟁반 위 초록빛을 내는 숫자 저울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려 애쓰는 과거의 내가 그랬다. 그때 선 공간은 일부이지만, 그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냉장고를 품은 그곳에 들를 때면 작았던 몸집보다 큰 도마 위에서 힘차게 손님을 맞이하는 우렁찬 목소리, 펄럭이는 앞치마, 묘하게 비릿한 생고기의 냄새와 은은한 조명이 깔린 쇼케이스, 썰어둔 고기 옆으로 어설픈 잔디 모양의 데코가 표현하고자 하는 신선함을 조금 수줍게 내비치는 듯 보였다.


붙잡은 손에 이끌려 드나들던 그곳에는 어떤 날에는 작은 전시장처럼 손질하지 않은 고기를 길게 걸어두어 이목을 집중시켰고 그땐 퍽이나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汎國民(범국민)의 소울푸드이자 한 끼의 저녁 식사와 반주까지 든든하게 책임지는 고기는 소보다는 돼지였고 조명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어린 마음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하루의 마지막 일과처럼 즐기던 할아버지와 가까이 살았던 나로서는 그 시절부터 선도 좋은 냉장의 분홍빛부터 조금은 옅은 색으로 얼어붙은 냉동까지 자주 목격했다. 미묘하게 다른 두 메뉴를 이리저리 경험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진 이름을 나름대로 본격적으로 시작해 소주와 함께 어른스럽게 정착되었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종종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자’라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IMG_7503.jpg

비 오는 날 막걸리에 파전도 좋지만 얼리지 않은 생고기가 참지 못하고 뿜는 육즙의 기름으로 덧칠한 불판 위에 지글지글 구워지는 김치를 질겅 씹으며 입천장까지 시원해지는 소주를 한 모금 털어 넣으면, 습기의 꿉꿉함과 들이닥치는 바람에 어딘가는 젖어 찝찝해질 일만 남은 바깥 사정을 깔끔하게 잊어버리게 만든다. 경험이 반복될수록 냉동하지 않은 ‘살아있는 고기’의 매력은 마음속 든든하게 자리 잡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수요의 시장에서 정통적인 하나의 장르이자 범람하는 구운 고기 세계관에서 분명하게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삼겹살’이라는 직관적이고 투박한 이름에 걸맞은 메뉴로 남았다.



IMG_7399.jpg

이제는 찾지 않는 추억 속의 들르던 정육점은 아니었고 하마터면 그런 곳인지도 모르겠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완벽한 외관이 거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서촌에 매료되어 자주 걸어보던 때다. 언제 가봤는지 기억이 묘한 ‘이상의 집'을 따라 걷다 이제는 세련되고 멀끔한 가게들이 하나둘 들어와 거리는 전과는 달리 理智的(이지적)으로 보였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세월의 투박한 공기와 떨어져 가는 간판 사이를 은은하고 따뜻한 조명과 이국적인 향을 풍기는 가게로 채워 넣었다. 또 다른 감수성이 한차례 더해졌다.


IMG_7410.jpg
IMG_7427.jpg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빛바랜 붉은 간판은 어렴풋이 떠오르는 은은한 핑크빛 조명을 연상케 한다. 늘어선 줄은 다채로움이 더해진 거리에서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직관적이고 어쩌면 손쉬워질 수 있는 이 메뉴가 단지 여기에서만 가능하기 때문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남은 실내까지 도달하는 데는 식사 시간과 견줄 만큼의 기다림을 치른다고 해도 기꺼이 그랬다.


IMG_7433.jpg
IMG_7435.JPG

썼다 지웠다 반복했을 보드는 더 이상 화이트가 아니었다. 그날의 고기 컨디션과 출처를 위해 적은 반가운 정육점 이름과 도축 날짜는 설득력을 높였다. 유혹에 움직이려던 발걸음과 요동치는 허기의 역동성을 달래 몇 팀이 앞에 남았고 나오는 사람은 몇 명이었는지 따위의 이야기로 거리는 수군거린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어린 시절 옥상에서 구워 먹었던 향수일지, 본격적으로 삼겹살을 시작할 때 느꼈던 처음 반주의 짜릿함인지를 두고 헷갈려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IMG_7463.jpg
IMG_7486.jpg

적지 않은 기다림에 툴툴거릴 시간이 없다. 달래던 허기에 급해진 마음을 억누르고 침착하려 애쓴다. 곳곳에 느긋해야 한다는 설명과 서두르지 말라는 이야기가 조바심을 내던 스스로를 숙연하게 만든다. 테이블의 회전이 중요할 법도 한데 벽에 붙은 온순한 설명도 찬을 내오시는 웃는 얼굴의 사장님도 별안간 그럴 생각은 없어 보인다. 타지 않도록 가능한 천천히 굽는 고기는 찌는 듯이 먹기 좋을 만큼 기름을 빼내고 노릇노릇해질 때를 기다린다. 뛰거나 빠르게 걷는 대신 천천히 사색하며 걷는 걸음을 제안하는 이곳이야말로 미처 잊고 있던 슬로우 푸드, 바쁘게 내달리기만 했던 일상에 ‘잠시 멈춤’을 떠오르게 했다. 가능한 침착하고 차분한 어투로 말한다. “사장님,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IMG_7490.jpg
IMG_7500.jpg

EDITOR

:HERMITAGE

BY_@BIG_BEOM

keyword
이전 04화보글보글 버섯매운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