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우동

*지도리우동 :겐로쿠우동 홍대본점

by HERMITAGE


문득 생각났다. 스치듯 흘러넘치는 기억을 따라 지나온 여러 구간을 거슬러 올랐다. 솔선하려 하지도 선구에 선 사람이 되려던 건 아니었다. 우연이라면 그랬고 그때도 지금도 호기심의 크기는 비슷했다. 흐린 기억이 맞는다면 좁은 주택 입구로 반 층 정도는 아래로 내려갔던 기억이 남아있다. 친구 녀석은 꽤나 상기되어 있었고 지금처럼 어딘가에 가면 홀연히 나타나 보이는 이름은 아니었다. 우연히 행렬의 맨 앞쪽에 가까이 선 사람이 되었다. 그때 가게 안은 고요했고, 편안하다면 평안했다. 숙연한 현지 분위기를 자아내려는 몇 가지의 시도는 아직은 제대로 닿아본 적 없는 그곳에 대한 환상을 지독한 여름 한철의 수학여행으로만 훑고 온 그 나라의 분위기를 그저 묵묵히 감싸 안는 정도였다. 달거나 짜던 그래서 오이 오차 녹차나 탄산수를 필요로 할 만큼 그곳만의 자극이 선명하다. 입에 감기는 감칠맛의 대가는 갈증에 목메는 묘한 중독으로 반복됐다. 그건 아마 그때라서 일 수도 있고 지금처럼 덥고 습한 날씨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따라나서던 길에 가본 적 없는 규슈 지역의 맛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종종보다 자주 생각났다. 검고 거친 벨벳의 국물을 뚫고 나오는 메인 재로의 후추 맛에 어떤 방식으로든 매료가 되고 있었다. 검은 맛에 대한 고찰을 평소에 떠올렸던 건 아니었지만 국물만큼은 그랬다. 맑고 투명한 적 없어 보이는 혼탁함. 거기에 거칠게 느껴지는 후추의 질감이 면과 토핑처럼 올려진 재료들을 하나씩 플레이하게 만들었다. 그라운드는 언제나 짙은 검은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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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기도 했고 지나치게 뜨겁기도 했다가 넉넉하게 품에 안긴 듯 편안함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선택원을 양도해 놓은 덕분에 ‘남기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어설픈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두려워 언제나 조금은 부족한 양을 선택한 덕분에 반찬처럼 먹어오던 사이드 메뉴는 한편 세트메뉴같이 구성되어 테이블에 오르곤 했다. 거대한 접시를 있는 그대로 석권해 내는 대식가는 못되지만 기왕이면 다채로운 맛을 경험하고 싶은 욕심은 늘 식탐보다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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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스친 기억으로 달라진 위치의 홍대 본점으로 향했다. 근처에 같은 이름의 가게가 생긴 후로 처음 경험을 시작했던 그곳으로의 발길은 줄어들어 대부분의 맛의 기억은 서울대병원 주변 골목길을 근간으로 한다. 줄을 서기도 했다가 줄 만큼 선 무리를 우르르 몰고 다니기도 했다. 해장의 성역 같아 보이는 장소가 되었다. 물론 그땐 술을 마실 수 없는 나이라 불을 뿜는 숨에서 급속하게 해방되는 환상을 경험하기도 훨씬 이전이었다.


그런 개운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뜨거운 열기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차츰 식어가는 순간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창업주가 고른 대접 같은 그릇째 들고 체온과 비슷하거나 더한 따뜻함을 넘어선 뜨거움을 꿀꺽 삼켜내는 일이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고 무겁게만 느껴지던 묵직한 몸이 해소되는 착각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거기에 취향을 반영해 원하는 그림으로 채울 수 있다는 든든한 설정이 오랜 시간까지 좋은 기억으로 남은 이유로 주저 없이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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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는 달리 무덤덤하게 만드는 입구는 낯설지만 익숙했다. 모두 오랜만이었지만 변한 건 없었다. 기억하던 맛과 알싸한 온도, 여전히 반가운 혼탁함에 입천장을 허락해야만 했다. 미리 준비되어 정갈하게 기다리던 유부초밥을 포기할리 없었다. 따끈따끈한 그릇이 눈앞에 나타나기 전에 기다림이 지루해질 틈 없이 손을 쓸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벌건 청양의 매운맛이나 이국적인 통증이 아닌 탁하게 매운 후추와 훈연으로 올려진 재료는 어쩐지 추운 겨울보다는 무더운 여름에 더 잘 어울린다. 그런 종류의 시원함이 찾아와서일까. 무더움에서 벗어난다기보다 숨을 돌릴 만큼 시원해진다. 서늘해질 만큼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놓고 차가운 것도 아니라 떠올려보자면 적당히 따뜻한 열탕 아닌 온탕 안에 몸을 지긋이 담그고 있는 기분이다.


맛은 불현듯, 문득으로 자리 잡아 종종보다는 자주, 한바탕 생각난다. 가벼이 들어가지 않는 밥알을 꼭꼭 씹기 어려울 때면 후루룩 마실 수 있는 메뉴를 찾고 그것들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유일한 맛으로 남아 언제든 들러도 좋다고 말하듯 담백하게 기다린다. 조심스레 가게로 내려가 보던 그때와는 달라졌지만 맛과 음식이 주는 인상은 지나온 시간에 비해 어느 하나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런 게 어쩌면 이 자리에서, 또 지금에 와서도 이렇게 다시 再會(재회)하게 만든 비결이 아니었을까. 그만큼 반가웠고 또 편안했다.


EDITOR

:HERM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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