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대국
직장 선배는 국밥 한 그릇 비워내는 날이면 날 놀리곤 했다.
“밥도 잘 안 챙겨 먹는 놈이 이건 잘 먹네”
나주였다. ‘나주곰탕’이라는 말이 괜히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듯 가게 안은 분주 했지만 여유로운 국밥의 맛을 봤다. 전라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적당히 고슬고슬한 밥과 리드미컬하게 넘어가는 목 넘김 속 특유의 풍미가 느껴지는 밥과 국물의 케미는 단 한 번의 기억만으로도 잊을 수 없다. 출장을 가지 않는 지금, 어떤 연고도 없는 멀고도 먼 곳에서 경험했던 맛의 기억은 선명하다. 서울에서 국밥에 대한 기대는 진작에 접었다. 직장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엔 국물이라는 게 꼭 필요한 한국인의 밥상에 대해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진 못했다.
식탁에서 목 넘김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중요한가라는 원초적인 물음에 설득되지 않았고 어느 시점까지는 국밥 한 그릇 든든하게 먹어야 하루가 허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체득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알게 모르게 메뉴 선정에 선택지 앞쪽으로 배치되어가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서울, 도시의 프레임 안에서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보내는 직장인들의 점심 메뉴나 퇴근 후 반주이자 술안주로써 제 역할을 다하는 국밥이라는 메뉴에 본격적으로 출석하기 시작한 건 여의도 [화목순대국]에서 부터였다.
비록 새벽시간에는 방문할 수 없는 코로나 시국에 접어든 이후인 최근에서야 꾸준히 방문하고 있지만 순대국이라는 거대한 타이틀 안에서 내용을 원하는 대로 수정할 수 있다는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순대만을 원하는 사람, 내장과 순대를 모두 원하는 사람과, 내장만 먹으러 온 취향에 공격적인 사람들의 니즈 모두를 해결한다. 투박하게 차려져 나오는 은색의 빛바랜 트레이는 세월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끼기에 충분하고, 담근 지는 좀 오래된 것 같아 보이는 언제부터였지 딱딱하지 않고 조금은 말랑한 깍두기의 정형화된 맛에서 고집스러움 마저 느껴진다. 같은 하늘 아래 한국인으로서 기본 찬에 마늘이 없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그마저도 동그랗게 썬 파와 맵지 않고 아삭한 고추가 달래준다.
후추를 따로 넣지 않아도 칼칼한 맛과 다진 양념기 따위로 맛을 변장한듯한 인상도 아닌 순백의 맑은 탕 스타일도, 그렇다고 자극적인 라면 수프 맛도 아닌 그 어느 중간에 있다. 해장국이라는 타이틀로 해장 메뉴를 표방하는 음식보다 더 설득력 있는 고유한 이름이 됐다. 숙취로 지배당한 뇌에서 기름진 게 생각나기 바로 전 단계인 탄수화물이 당기고, 지난밤 야근에 지친 간에게 포상을 줘야 하는 순간 떠오르는 뜨끈하고 묵직한 한방의 식사. 초점은 선명해지고 아득했던 정신이 아주 조금씩 맑아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지칠 하루를 버텨 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며 비교적 고민 없이 고를 수 있는 식사 메뉴로서 [화목순대국]은 꽤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여의도였다. 여러 차례의 방문을 하며 메뉴의 변주가 있었다. 반주와 같이 주류와 함께하진 못하는 점심시간이었다. 그동안 메뉴가 등장하는 순간 이성이 마비되어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해 광화문 1호점을 찾았다. 여의도와 달리 (특) 메뉴가 없다는 다른 점을 조용히 생각하며 입장한 가게 안에서 배정받고 앉아 메뉴를 기다리며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두 곳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파가 잘 올려진 팔팔 끓어 나오는 국밥 한 그릇을 테이블 위에 얹어 올렸다. 지금까지 먹어왔던 여의도의 [화목순대국]이 아들의 공간의 맛이라면 광화문은 어머니가 해준 느낌이다. 아들의 가게가 결코 가볍다는 건 아니지만 국밥에 온도, 국물의 끓는점이 조금 다르다고 느껴졌다. ‘엄마’는 더 알차고 실한, 한 수저 더 뜨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특)이 아니라도 차고 넘치는 양과 더 진한 풍미에서 깊이감의 미묘한 차이를 느꼈다. 여의도를 세 번 이상 방문했고 모든 종류의 옵션을 선택해 본 후에 광화문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의도에서만 화목을 경험했다면 감히 화목순대국의 전부를 이해했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근처를 지난다면 가까운 곳에서 아들이 든 엄마든 어떤 맛이 든 선택하겠다.
Hermitage
@big_be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