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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Sep 12. 2020

당신은 나를 미워할 자유가 있다

롤링페이퍼 악플의 기억






중학교 때 반에서 롤링페이퍼를 했다.




익명이라지만 내용만 읽어봐도 어떤 친구가 쓴 건지 알 수 있었다. 그게 롤링페이퍼의 매력이기도 했다. 티 나지만, 티 나지 않게 속마음 전하기.




롤링페이퍼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상대에 대한 칭찬과 '친하게 지내자'로 귀결되는 다짐,  혹은 쓸 말이 없어서 대충 끄적인 내용.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는 적은 좀처럼 없었다.




그런데 그날 내가 받아든 롤링페이퍼에 한 문장이 유독 내 시선을 끌었다.






'너 너무 시끄러워서 싫어!'






오늘날로 말하자면 나를 향한 '악플'이었다.






싫다는 말은 이해가 되었으나 '시끄러워서'라는 이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시끄러운'이라는 수식어는 당최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목소리가 작아서 마음먹고 크게 내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말해달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그런 내가 시끄러워 싫다니...











'그냥 내가 싫다는 말이구나.'









롤링페이퍼에 납득 가능한 이유가 적혀 있었다면 그 이유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읽어봐도 '싫다'라는 말을 쓰기 위해 억지로 지어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타인의 거부 표현과 부정적 감정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다. 한마디로 부정적 감정을 다루는데 무척 서툰 아이였다.






그저 어떤 이유로든 타인에게 '미움'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미움받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 롤링페이퍼의 악플은 글씨체만 보아도 누가 썼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시절엔 여자 친구들끼리 엽서를 주고받는 게 하나의 문화였다. 따라서, 같은 반 친구라면 그들의 글씨체도 동시에 떠올릴 수 있었다.




그 글씨체의 주인은 나랑 막역하게 친하다고도, 친하지 않다고도 하기 애매한 사이였다.




서로 악감정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친구가 실은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미움'내 노력에 의해서 거두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쉬는 시간에 롤링페이퍼를 들고 그 친구에게 다가가서 조용히 물었다.




"이거 혹시 네가 쓴 거야?"




나는 그저 내가 잘못하게 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나를 향한 미움을 거두고 싶었다.






사색이 된 그 친구의 표정을 보고서야 '아차' 싶었다. 그때 상황이 무언가 내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 내가 썼어. 자, 때리고 싶으면 때려!"라고 대답하며 친구는 자신의 한쪽 뺨을 내게로 내밀었다.




'때리고 싶으면 때리라니?' 나는 당황했다.




그 친구는 나보다 키도 한 뼘이나 더 컸기에 교실 한쪽 벽에 기대어 내게 자신의 뺨을 내민 그 친구를 올려다보는 이 상황이 블랙 코미디의 한 장면 같았다.






나는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어? 아니 난 혹시 너에게 내가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런가 싶어 잘 지내자고 사과하려던 거야,"라고 말했다. 그리곤 한 손을 내밀며 화해의 악수를 청했다.




순간 그 친구의 얼굴에서 스친 경멸의 표정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친구는 예의상 마지못해 내 손을 마주 잡았고, 우리는 화해의 악수를 했다.






내가 원하는 데로 화해를 했지만 뒷맛이 영 씁쓸했다. 그때의 나는 그 씁쓸한 뒷맛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알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등줄기가 서늘하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익명으로 쓴 나의 악플을 들고 와 '이거 네가 쓴 거 맞지?'하고 묻는다면... 평생 다시는 그 상대를 좋아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멍청하고 서툴렀던 나는 내가 대인배답게 처신했다고 생각했다.










안 봐도 뻔하지만 그날 이후 그 친구는 나를 더욱더 싫어했다.




그녀는 나를 향한 감정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허나 미움받는 쪽에선 말하지 않아도 절절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당시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나의 좋은 의도는 왜 더 안 좋은 결과를 낳은 것일까?'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많은 관계들 속에서 깨지고, 성장하며) 깨달았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던 최선은 그냥 그 친구가 나를 미워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미움에 반드시 논리적인 이유나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왜 나를 미워하지?"는 애초에 적당한 질문이 아니었다.




타인을 미워하는데 각자의 상황과 이유가 있겠지만, 그게 반드시 그 대상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오늘 이 오래된 기억을 불러들인 이유가 있다.




최근에 의도치 않은 미움을 사게 되었는데 그게 내내 마음이 쓰여 불편했다.




미움이란 감정에 서툰 나는 '또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되었다.






상대가 나를 미워한다고 표면으로 드러내지 않은 상황에서 내 과거의 서툰 아이가 또 일을 그르칠까 봐 걱정되고 겁이 나서


글을 쓰기로 했다.






미워하게 두 자. 나를 미워할 타인의 자유까지 뺏으려 들지 말자.




이것이 오늘 내가 내린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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