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뮤 Jan 29. 2020

아직도 널 사랑하고 있어

결혼 후 고백 받은...ssul...

 

에펠탑의 신랑신부 by. 마르크 샤갈


 



 "내 오랜 비밀이야, "라고 G는 말했다. 남편과 대판 싸우고 언니네로 피신 중이라는 나의 답장이 그의 용기를 북돋았는지 모른다.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지하철을 타고 노원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내게 가장 안전한 은신처는 그곳뿐이었다. 지하철을 타기 직전, 지금이라도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대로 열차에 올라탔다. 호기롭게 속옷과 화장품을 챙겨 마치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떠나는 모양새로 나왔기 때문에 돌아갈 땐 가더라도 오늘 밤은 아니었다. 만원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겨우 자리가 나서 앉은 후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둔 찰나 G에게 인스타 메시지가 왔다. 2년 만이었다. 내 결혼 이후 처음 보내온 메시지였다. 타이밍을 재고 재다, '이때닷!'하고 보내온 것처럼 우연치고는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G는 잘 지내냐는 인사와 함께 내가 하도 페이스북에 들어오지 않아서 이제 인스타를 하려고 한다고 했다.


 나는 울적한데 옳다구나 싶었다. G에게 하소연이나 하면서 가야겠다고. 

 "타이밍 참 웃기다. 지금 남편이랑 대판 싸우고 언니네로 가는 지하철 안이야" 나는 말했다. 


G는 최근에 두 번째 여자 친구, 몇몇의 친한 친구 그리고 가족들과 헤어졌다고 했다. 첫 번째 이별 때처럼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마리화나는 피우지 않았고 맑은 정신으로 이겨냈다고 했다. 이별을 극복 한 이후로 자신은 진정한 아티스트로 거듭났고 더 강하고 더 자유롭고 더 창조적으로 변했다고 했다. 


그의 근황을 듣고 보니 내 사소한 부부싸움이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내 푸념도 늘어놓았다. 한 때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 가장 미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슬프지 않니, 내게 너만큼의 용기가 있었더라면 더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겠지, 혼자가 되고 싶은 유혹보다 혼자가 된다는 두려움이 항상 더 크다는 게 나의 문제가 아닐까,라고.


 G는 외로움과 고통은 강력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면 세상 누구도 해칠 수 없는 강인함과 젊음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바로 그 증거라며. 


그는 그 오글거리는 슈퍼히어로 대사 같은 말을 한 뒤, 아직도 널 사랑하고 있다고 했다.


 I'm still in love with you (my old secret)


짧은 문장이었지만 읽고 또 읽었다. 메시지 칸에 커서는 계속 깜박이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 침묵이 길어지자 G는 서둘러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너의 친구로 남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 '라고 덧붙였다. 나는 G에게 솔직하게 네가 나를 좋아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는 더 할 말이 없어서 담백하게 고맙다고 한마디 덧붙였다. 


사랑한다는 고백에 고맙다니. 뭐 그런 대답이 다 있나 생각했지만 유부녀가 그 상황에서 딱히 무슨 말을 더 할까.






 G는 체코에서 온 교환학생이었다. 대학교 때였으니 벌써 10년도 전이다. 아담한 키에 짙은 갈색머리 그리고 창백한 흰 피부의 외국인이었다. 당시 회화를 전공하는 학생들로 구성된 우리 스튜디오에서 같이 공부하게 되었고, 교수님은 영어를 할 수 있던 나에게 G를 특별히 잘 도와주라는 부탁을 하셨다. 필요한 말들을 통역해주고, 점심시간에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고, 가끔은 밤늦게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탁구를 치거나 농구를 했다. G와 내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당시 나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게다가 G와 단둘이 무언가를 하는 시간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동기들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G가 나에게 호감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은 자신이 즐겨 듣는 음악으로 채운 CD를 선물했을 때였다. 우리는 10명 정도의 학생들이 함께 쓰는 공용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우연히 G가 틀어놓은 음악을 듣고 곡이 너무 좋다며 가수 이름을 물은 적이 있었는데 다음 날 자신의 플레이리스트가 담긴 CD를 선물한 것이다. 그의 플레이리스트에서 그 전날 들은 곡을 빼고는 취향에 맞지 않았다. 


 이것 말고도 작업실에서 내가 흥얼거린 노래를 몰래 녹음했다는 G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나 G가 작업실에 내가 안 보일 때마다 어디 있는지 묻고 또 묻는다는 동기들의 이야기를 건네들 었을 때 '혹시'하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어떤 확신을 갖기에는 그의 호감 어린 행동들이 좋은 친구사이에도 충분히 가능한 정도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 진실 여부가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1년은 금방 지나갔고 G는 그가 그린 손바닥 만한 크기의 그림과 엽서를 남기고 체코로 돌아갔다. 그 엽서에는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쓰여 있었다. 80년대도 아니었으니 한국에서 체코의 거리는 서울에서 부산의 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페이스북 친구였고, 잊을만하면 한 번씩 그에게서 안부를 묻는 메시지가 왔다. 


 그러다가 어느 날 G는 내가 살고 있는 한국 주소로 편지를 보내겠다고 했다. 머지않아 한 통의 편지가 체코에서 날아왔다. 꽤 두툼했다. 5~6장 정도 되는 흰 종이에 아름다운 필기체가 꽉꽉 차 있었다. 글씨가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읽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따로 접혀 있던 다른 한 장의 종이에는 반듯하고 빽빽하게 격자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종이 정중앙에는 까만 점 하나가 칠해져 있었다. 오목이었다. 그는 편지에 우리가 함께 오목을 두던 그 날을 기억하냐고 썼다. 기억나지 않았다. 억지로 기억을 떠올려보면 어렴풋이 그랬던 것 같기도 한, 그런 정도의 기억이었다. 그는 앞으로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한 점씩 채워 오목을 두자고 했다. 징그러울 정도로 로맨틱했다. G의 첫 수에 나도 응해야 하는지 고민을 했다. 내가 그 편지에 답장을 보냈는지, 보내지 않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내 불완전한 기억에 의하면 그 편지가 그가 보내온 처음이자 마지막 우편이었던 것 같다. 


 G의 뜬금없는 고백으로 잠시 어색해진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최근에 작업하고 있는 작품들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장의 사진을 전송했다. 3미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대형 크기의 여러 가지 그림과 석고로 만든 것 같은 조각이었다. 특히나 동물 형상을 한 그 조각의 제목이 'Korean Sculpture(한국 조각)'이라고 했다. 두 마리의 동물 머리가 서로 반대 방향을 보며 껴안듯 붙어있었는데 한쪽으로 놓고 보면 호랑이의 얼굴이었고 반대쪽으로 놓고 보면 곰의 얼굴이었다. 단군신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아직도 G는 한국에서의 기억 속에 살고 있는 듯했다. 


 반가움에 바로 답장을 했지만 이내 이 대화를 어서 끝내고 싶었다. 저 먼 타국에 누군가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고백이 남편과의 싸움으로 바닥 친 내 자존감을 조금 끌어올려준 것은 사실이지만 마냥 기분 좋게 생각하기에는 묘하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더 대화를 이어나가려는 G에게 아쉽지만 언니네 집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아직 도착하려면 1시간도 넘게 남았지만 상관없었다. 


  언니와 형부 나. 이렇게 셋이 만나면 꼭 학창 시절 친했던 삼총사가 다시 만난 것처럼 낄낄거리고, 깔깔거리면서 기탄없는 시간을 보낸다. 다음 날이 되었다. 언니네 집에서 에너지를 좀 채우고 났더니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생겼다. 어서 빨리 남편과의 멀어진 거리를 메우고 화해하고 싶었다. 어쩔 때는 환장하게 미운 남편이지만 아직도 그와 싸우고 나서 이틀을 버티지 못한다. 게다가 G에게 고백받은 썰을 풀며 자랑을 하고 싶었다. 질투하는 시늉도 하지 않겠지만 뭐 역시나 상관없었다. 

      

 G는 내가 집으로 돌아온 날 밤 또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나와 전화 통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지금은 통화하기 어렵다고 거절을 했다. G는 포기하지 않고 왜 안되는지 물었다. 나는 핑곗거리를 찾다가 남편이 옆에 있어서 통화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내 딴에는 가장 강력하면서 간단한 거절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답변이 왔다. 


"슬프다. 너는 남편이 있을 때 옛 친구와 통화도 못하는 거니?"


 나는 황급히 그런 뜻이 아니었으며 남편은 지금 영화를 보는 중이라 그를 배려하는 것이라고 에둘러댔다. 그러나 이 대답도 좋은 답변은 아니었나 보다.


"이런, 너의 남편은 영화를 볼 때 헤드폰을 사용하는 매너는 배우지 못했구나!"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한 번 더 설명을 해보았다. 밤늦게 가족이 함께 있는 공간에서 전화하는 것은 한국에서 예의가 아니며 이는 문화적 차이라서 네가 이해하긴 어려울 거라고.


G의 다음 한 마디를 통해서 그동안 내가 그의 애정에서 느끼던 그 석연치 않은 무엇인가가 무엇이었는지 드디어 알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런, 너 남편을 두려워하는구나. 그렇지?"


G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한 말이었다면 미안하지만 나는 그의 메시지를 읽고 그만 큰소리로 웃고 말았다. G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를 어떻게 기억했으며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의 눈에는 내가 쌍꺼풀 없이 쭉 찢어진 눈을 가진 검은 머리의 동양 여자, 바로 서양인들의 스테레오 타입에 딱 맞는 연약하고 가엾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가 10년간 간직 한 그 사랑이라는 것은 사실 내가 아니라 그가 처음 한국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발 딛었을 때 만난 상상 속에 그리던 그 '동양 여자'였던 것이다. 


 그의 사랑에 정작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빠져 있었다. 그는 혼자 사랑하고, 혼자 대화하고, 혼자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때때마다 건네는 그의 안부가 반가웠음에도 불구하고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는 나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고백을 한 순간에도 내 이야기는 듣지 않았다. 혼자서 써 내려가는 사랑 이야기에서 자신이 해야 하는 대사를 열심히 읊었을 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고 나니 이제 내가 무슨 대답을 하든 G는 자신이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대답이 없자, G는 더는 가만히 읽고 있기 괴로운 조언을 쏟아냈다. 


 "나는 문화를 이용하지 따르지 않아. 나는 나만의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어. 내가 만들어 가는 문화의 이름은 '자유'야. 문화를 따르는 것은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아. 왜 내가 타의에 의해서 원치 않는 문화를 따라야 하지?" 


 속이 메슥거렸다. 이 오해를 바로잡기엔 너무 피곤했고, 그의 오글거리는 중2병 멘트를 단 한 문장도 더는 읽고 싶지 않았다. 나는 동방예의지국의 딸답게 예의를 갖춰 이 대화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좋겠다. 어쩜 너에겐 아티스트란 직업이 딱이구나! 밤이 늦었어. 잘 자"


이게 G에게 보내는 나의 마지막 메시지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친구 같은 남편의 숨은 의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