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에 눈을 떴다. 매일 밤 자기 전에는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야지, 다짐을 하지만 눈을 막상 뜨면 정신이 없다. 하도 꿈을 많이 꾸는 데다가 한번 감정이입이 되면 쉽게 그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 잠에서 깬 후 20분 정도는 충분히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8시 20분쯤 드디어 현실로 완벽히 복귀한 나는 서둘러 밥통을 열어본다. 아침 식사는 당연하게 건너뛰던 나였지만 2년 전에 크게 아프고 난 후로 아침식사를 하는 게 습관이 됐다. 어제 공원 걷기의 영향인지 평소보다 강한 허기가 느껴졌다. 설마 한 번 운동했다고 바로 입맛이 돌아올 리 없지만 그렇게 믿기로 한다.
어제 먹다 남은 김치찌개와 유통기한이 거의 다 된 우동을 끓였다. 남편과 사이좋게 밥 반공기, 우동 반 그릇씩 나눠먹었다. 아침 9시가 되었다. 나는 서둘러 양치를 하고 후드티와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남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왜?"하고 묻는다.
"나 어제부터 매일 걷기 운동 시작했어!"
매우 즉흥적인 결심이었지만 사실 마음먹은 지는 꽤 오래된 묵은지 같은 계획이었다. 남편은 "오올~~"하며 눈을 찡긋했지만 본인은 함께 참여할 의사가 전혀 없는지 도로 침대에 가서 눕는다. 사전투표까지 마쳐서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뱃살을 애지중지 키우려 작정한 것 같다. 나는 남편과 같이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쿨하게 인사를 하고는 대문 밖으로 나섰다.
집에서 근처 공원까지는 보도로 15분 정도 걸린다. 8차선 도로를 한번, 6차선 도로를 두 번 건너야 한다. 가는 길은 백화점과 각종 음식점을 비롯한 가게들이 많아서 정신이 없다. 걷기 운동의 의지가 공원으로 가는 사이에 줄어들까 봐 오늘도 자전거를 가지고 나왔다. 아침에도 적당히 붐비는 인파 사이를 자전거로 빠르게 지나치면 기분이 좋다.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본격적으로 팔다리를 움직인다. 어제보다 볕은 조금 더 따듯해졌고, 바람은 줄었다. 귀에 무선 이어폰을 끼고 오늘도 팟캐스트를 들었다. 어제 들었던 방송의 2부였는데 또다시 뼈 때리는 조언이 귀에 꽂혔다.
"제가 여러 사람들을 상담하다 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불면증에 시달린다, 생각이 너무 많다고 해요. 근데, 이거 답은 정말 간단해요. 몸이 너무 편한 거야.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봐야 해요. 몸을 안 움직인 거지. 고민 있다고 가만히 앉아서 고뇌만 하면 불면증이 오는 게 당연하지. 그런 분들에게는 몸을 한번 혹사시켜보라고 조언해요. 그냥 무작정 걸어보는 거예요. 5 천보, 고민이 좀 깊으면 1만 보 그래도 마음이 심란하면 3만 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걸어보라고요. 근데 만약 3만보를 걸었는데도 생각이 많고 밤에 잠을 못 잔다? 그건 전문의한테 찾아가는 수밖에 답이 없지."
그 이야기를 듣는데 귀가 빨개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평소에 입에 달고 사는 말이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와 "밤에 잠이 안 와"였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 말이 맞았다. 나는 그동안 몸이 너무 편했다. 혼자서 이 고민, 저 고민, 이 생각, 저 생각 머리로만 힘들어하고 괴로워했지 정작 몸은 집에서 앉거나 눕는 일 말고는 큰 힘듦이 없었다.
어제는 큰 어려움 없이 바로 잠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고작 이틀째 걷기 운동을 하고 있지만 내가 이제야 바른 길로 들어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을 걷는 동안 나의 존재를 오롯이 느낄 수 있으며, 내가 좋아하는 고요함을 만끽하며 충분한 사색도 즐길 수 있다. 맨날 입맛 없다, 피곤하다, 생각이 많다 불평하던 내가 우스워졌다. 걷기 한방이면 해결되는 일이었는데...
열심히 공원 한 바퀴를 막 돌았을 때 장에서 신호가 왔다. 오늘은 좀 빠른 걸? 어제는 걷기 운동을 다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 신호가 왔는데 오늘은 한 바퀴가 다 끝나기도 전에 화장실을 찾았다. 몸은 정직하구나 또 한 번 느낀다. 장운동이 원활하다는 증거가 이렇듯 부정할 수 없게 눈 앞에 펼쳐지다니. 어제와 오늘, 같은 증거를 변기 속으로 흘러내리며 '앞으로 걷기 운동전도사라도 돼야 하나?'라며 혼자서 웃었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아름다운 공원을 걸었다. 공원 잔디밭에서 총총대는 주먹만 한 아기 까치도 유심히 관찰하고, 산책 나온 귀여운 강아지들에 함박 미소도 지으며 전진 또 전진했다. 어제는 느릿느릿 두 바퀴를 걷고 집에 갔는데 오늘은 네 바퀴를 걸었다. 슬슬 골반이 저릿하며 이만하면 충분히 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목 밴드를 확인해보니 총 6,446보를 걸었다. 시간은 대략 50분 정도 걸렸다. 평상시였더라면 아침식사를 하며 켜놓은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려서 휙 하고 사라졌을 한 시간이 이렇게 의미 있고, 밀도 높게 쓰일 수도 있었구나.
이렇게 간단한 걸 왜 이제야 결심했을까?
그냥 흘러 보낸 과거의 시간들이 한없이 아쉬워졌다. 하지만 앞으로 내가 보낼 일 년의 시간은 결코 전과 같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니 오늘도 아무 고민 없이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