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뜻한 모닥불 Aug 20. 2023

6주 차 : 주양육자와 부양육자의 사이에서, 수면교육

"오늘부터 잔디 수면교육 시작해야 해."

- 2023년 5월 22일 -  


잔디가 태어난 지 40일째 되는 날 저녁, 막 퇴근한 나에게 아내가 말했다.


보통 출생 후 1개월까지를 신생아라고 표현하므로 인생 40일 차를 맞이한 잔디도 이제 신생아 신분을 벗어나서 아기(?) 신분으로 한 단계 상승한 상태였다. 잔디는 그동안 신생아로서 기본적으로 약 3시간 간격으로 반복되는 루틴을 잘 유지해 왔다. 오전 6시에 일어나서 대변이나 소변을 본 후 모유나 분유를 일정량 먹고 트림 후 누워서 모빌이나 초점 책을 보다가 오전 7시쯤 부모의 품에 안겨서 잠이 들면 침대에 눕혀져서 계속 잔다. 다시 오전 9시에 일어나고 이어서 정오, 오후 3시, 오후 6시, 오후 9시, 자정, 새벽 3시를 거쳐서 다시 오전 6시로 돌아오는 패턴이다. 각각의 3시간 루틴은 크게 1시간의 활동과 2시간 수면의 2개 파트로 나뉘게 되므로 결국 신생아는 하루의 3분의 2인 약 16시간은 잠을 자면서 보내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생아의 생활 패턴에 맞춰서 양육자도 같이 움직이게 되고 나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당장 오늘부터 수면교육을 해야 한다고?


아내의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신생아 중환자실과 산후조리원을 거쳐서 집으로 온 지도 어느덧 3주가 지나가는 동안 나에게 육아라는 영역은 기본적으로 기저귀 갈기, 목욕시키기, 분유 타고 먹이기, 안아서 재우기, 젖병 세척 등 몸으로 하는 일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사실 내가 회사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동안 아내가 주도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육이라 함은 단순히 몸으로만 하는 것이 아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이 아닌가. 교육은 글자 그대로 가르치고 기른다는 뜻과 같이 일방향적인 행위가 아니라 아이가 영향을 받아서 반응하게 만들어야 하는 상호작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갑자기 부담감이 밀려들었다. 막연하게 교육은 아이가 더 크고 나서, 한참 나중에야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그동안 정신없음을 핑계로 육아의 큰 틀에 잠시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에 뜨끔했던 것이리라.


사실 아내가 임신을 하고 난 후부터 나는 출산과 육아 관련 공부를 나름대로 꾸준히 했었다. 한국 사회에서 일하는 여성이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을 제대로 무사히 거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이미 익히 알려져 있으며, 맞벌이를 하고 있던 나의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될 경우 앞으로 온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현실을 여러 여성 직원 분들을 통해서 실제로 지켜봐 왔던 터였기 때문이다. 임신은 모든 이로부터 마땅히 축복받아야 할 기쁜 일이지만 정작 젊음과 열정을 바쳐서 열심히 일했던 회사에서는 크게 환영받지 못한다. 회사 구조적으로 결원을 채우기 힘든 탓에 결국 남은 팀원들이 육아 휴직자의 몫까지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출산을 앞두고 휴가에 돌입해서 육아 휴직 기간을 마치고 복귀하는 순간까지 여성은 육아와 가사 노동으로 끊임없이 부가가치를 생산해 내지만 정작 회사에서는 집에서 쉬고 있는 것으로 오인한다. 그리고 회사에 복직한 후에는 워킹맘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음과 동시에 일과 가정, 양쪽에서 둘 다 완벽하게 잘하기를 요구하는 사회적 시선과 맞닥뜨린 채 살아간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맞이해야 할 임신과 출산은 남성이 대신해 줄 수 없지만 최소한 육아는 대신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함께 잘해 나가겠다고 굳게 다짐했었고 자신감도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다짐과 자신감 덕분에 아내도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를 낳고 잘 기를 수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잔디가 태어난 후부터 나의 아빠로서의 육아에 대한 다짐과 자신감의 온도는 급속도로 달라졌다. 우선 절대적인 시간 여유가 많이 줄어든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예전에는 집안에 따로 돌봐주고 신경 써야 하는 존재가 없었기 때문에 퇴근 후 남는 시간이 많았고 그 시간에 육아 공부를 미리 틈틈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근하고 집에 오면 바로 실전에 투입돼서 아내와 같이 잔디를 돌보고 신경 쓰다 보면 어느덧 잘 시간이 된다.(물론 이 잠도 3시간 후에 다시 일어나야 하는 잠이다.) 아기는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변화하고 성장하기 때문에 그 시기에 맞춰서 적절한 공부, 준비, 대응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는 따로 남는 시간이 없으니 육아 공부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결국 자연스럽게 현재 주양육자의 역할을 맡고 있는 아내에게만 육아를 의존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수면교육은 그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육아와 관련된 새로운 과정들이 끊임없이 계속 추가가 되겠는가. 그때마다 계속 육아를 아내에게만 의존한다면 아기가 태어나기 전 내가 했던 다짐과 자신감들은 한순간에 잿더미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냥 이렇게 흘러가는 대로 보고만 있을 것인가? 뜨끔함과 동시에 경계심 느꼈다.


예전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는 맞벌이가 아니라 외벌이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엄마가 계속 주양육자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맞벌이가 일상이 된 요즘 시대에도 맞벌이 부부가 아기를 가지게 될 경우 보통 출산 휴가와 육아 휴직을 먼저 사용하게 되는 엄마가 주양육자가 되고 회사에 출퇴근하는 아빠가 부양육자가 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아내 또한 아이를 낳기 불과 한 달 전까지 지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매일 회사로 출근해서 열심히 일을 했었고 그 이후에야 육아와 관련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결국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는 주체인 엄마도 애초에 육아를 남성보다 잘하는 특성을 가진 게 아니라 아빠와 똑같이 육아를 처음 하게 되는 초보 부모일 뿐인 것이다. 또한 출산 휴가와 육아 휴직을 먼저 사용한 죄(?)로 덜컥 주양육자가 되어버린 엄마도 1~2년의 육아 휴직 기간이 지나면 다시 회사로 복귀해야 하는데 그때부터는 과연 누구를 주양육자로 봐야 할까?


잔디의 수면교육 시작을 계기로 40일간 정신없이 달려왔었던 아빠로서의 삶과 육아에 대한 마음가짐을 돌이켜볼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회사에 매일 출근해야 하는 내가 어쩔 수 없이 부양육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육아를 주양육자인 아내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아내는 주양육자로서 이미 수많은 선택과 의사결정들을 반복하면서 육아의 전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메뉴 고르는 것 하나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육아는 먹을 것, 입을 것, 가지고 놀 것 등 아기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그것도 아기에게 가장 잘 맞고 좋은 것으로 끊임없이 검증하고 선택하는 것부터가 시작이 아닌가.


아내가 육아 휴직을 마치고 회사에서 복직하면서부터는 아내와 내가 둘 다 주양육자의 역할을 반반씩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잔디에게 아빠의 손길이 더 필요한 순간이 오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육아 휴직을 쓰고 단독으로 주양육자가 될 것이다.(물론 회사의 눈치는 단단히 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때까지 단순한 부양육자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의 주양육자인 아내와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하고 이를 계속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육아 휴직이 지금보다 일상적인 풍경이 된다면 나를 포함한 모든 아빠들의 육아에 대한 접근 방식 자체가 달라지고 상상력이 더 풍부해질 수도 있을 텐데 지금은 생각하는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아쉬움이 들었다.


저녁 7시 30분부터 시작된 수면교육은 다행히 걱정했던 것보다는 성공적으로 잘 끝났다. 집에 있는 나무, 모빌, 그리고 거울 속의 자신과 작별인사를 하는 수면 의식을 마치고 백색소음이 울리는 어두운 방으로 입장한 잔디는 약 30분 동안 몇 번의 저항 끝에 본인의 침대 위에서 스르르 잠들었다. 물론 오늘부터 시작수면 교육을 위해 낮과 의 구분을 인지할 수 있도록 미리 낮에는 밝은 조명을 유지하고 녁 시간이 가까워 올 무렵에는 낮잠을 조금 덜 재우는 등의 사전 준비 작업을 완벽하게 해 둔 아내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잔디가 잠들고 난 후 마루에서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보면서 수면교육은 결코 단기적인 아닌, 장기적인 호흡이 필요한 육아라는 큰 틀 속에서 필수적인 생존 전략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기는 충분한 수면 시간을 확보함으로써 성장과 발육에 좋은 영향을 받을 것이고 부모는 육아뿐만 아니라 보통의 일상생활 즐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소파에 앉아서 오랜만에 전자책 플랫폼에 접속한 나는 육아 서적을 검색하고 즐겨찾기 목록에 추가했다.


'자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 ENFP인 저(남편)와 ESTJ인 아내가 남과 여, 각각의 시선에서 육아 에세이를 함께 쓰고 있습니다. (아내의 시선 : 1주 차)







  












이전 05화 5주 차 : 부모님의 품에 안긴 손녀, 가족이라는 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