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 사랑! 나라 사랑
"역시 동기가 최고야!" "동기사랑 나라사랑" 첫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고 한 달간 가장 많이 외친 말이다. 고등학교 동창, 대학교 동창과도 해보지 않는 우정보다 상위 레벨의 '사랑'이란 말을 동기에게 쓰다니! 요즘은 회사마다 수시채용을 많이 하기 때문에 동기라는 개념이 많이 없어졌지만, 8년 전만 해도 동기가 최고인 시절이었다. 동기라는 단어는 생각보다 사람들을 끈끈하게 만들어줬다. 우리가 같은 그룹사와 회사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누구보다 절친한 친구를 만들어주는 마법의 단어였다.
첫 회사에 처음 입사했던 2016년 즈음에는 대기업 입사를 하면 꼭 그룹사 연수를 갔다. 그룹에 소속된 회사가 두 그룹으로 나눠서 경기도에 있는 인재개발원에 2주간 가서 연수를 받았었다. 각 회사별로 2~3명씩 선별해서 조를 짜주고 조 안에서 기업의 핵심가치도 외우고, 밥도 같이 먹고, 레크리에이션도 진행했다.
2 주간의 연수동안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은 바로 장기자랑이었다. 단합을 하기 위해선 같이 땀을 흘리며 춤을 추는 코스가 필수라고 했다. 조원들과 며칠을 연습하면서 미니 뮤지컬을 준비했다. 평상시에 나라면 절대 도전하지 않았을 춤과 노래였다. 노래 중간에 남자들이 여자를 올려서 춤을 추는 퍼포먼스가 있었는데 가장 막내였던 내가 당첨이 되었다. "우주가 막내고 가장 가벼울 것 같으니깐 올라가자" 남자 동기들이 나를 들어 올리면 나는 위에 올라가고, 같이 빙글빙글 도는 춤이었다. 내향적인 성격에 춤을 쳐본 적도 없던 나는 쥐구멍에 숨고 싶을 만큼 민망했던 순간이었다.
특히 술자리가 정말 많았다. 입사한 후 3달 동안은 거의 매일 퇴근 후에 술자리가 있었던 것 같다. 그룹사 동기, 회사 동기 등 다양한 소그룹에서 연락이 왔다. 매일 긴장했던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퇴근하고 인천까지 가는 것이 피곤해서 참석하고 싶지 않은 날이 많았다. 하지만 나 혼자 가지 않는다고 하면 소외될까 봐 걱정이 됐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언니오빠들을 만났다. " 아 진짜 웃겨. " "야 우리 여행 가자!" 요즘으로 치면 정말 다양한 MBTI 가 만나서 갑자기 친한 친구가 되며 매일 술도 마시고 여행도 가는 사이가 된 것이다.
이런 친목은 내향적인 나에게는 생각보다 큰 괴로운 일이었다. 중학교와 대학교, 대학교 시절 모두 나는 나와 잘 어울릴만한 친구들과 소소하게 어울리며 놀곤 했었다. 너무 목소리 큰 사람을 싫어하고, 술을 잘 마시는 친구들하고도 자연스럽게 멀어졌었다. 언제 봐도 잔잔하게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들이 많았고 나도 그게 나의 인간관계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회사에 입사 후 나름 활발하다고 생각했던 내 성격에 스스로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정말로 동기들과 할 말이 많지 않았고 즐겁지 않았다. 그 당시의 나는 24살이었고, 대학교만 다녔지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해본 경험이나 취미도 없었다. 그냥 단지 집에 가서 쉬고 싶었던 신입사원일 뿐이었다.
"우주는 우리랑 놀기 싫어서 구두 수선한다고 집 간다 했잖아. 너무해"
신입사원일 때 만난 동기가 아직도 이야기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거의 매일 술자리를 가진 지 한 달쯤 됐으려나, 그날도 잡힌 동기와의 술자리가 너무나도 가기 싫은 날이었다. 하지만 약속도 별로 없고, 취미 생활도 없던 내가 핑계 댈 거리가 무엇이 있었겠는가. 우선 모임에 참석은 했지만 나는 저녁 9시가 되자마자 그곳을 나서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아이디어는 바로 '구두 수선'이었다. 2016년도만 해도 회사는 비즈니스캐주얼 컨셉에 맞는 의상을 입고 출근해야 했다. 넥타이까진 아니지만 블라우스와 치마, 단정한 구두는 필수였다. 그런데 그 중요한 구두가 망가져서 수선을 해야 하는 건 엄청난 일이 아닌가! 나는 너무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동기들에게 이야기했다. "나 오늘 꼭 구두 수선을 해야 해서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 먼저 가볼게. " 24살의 나는 좋은 핑곗거리라고 생각했는데, 언니 오빠였던 동기들 눈에는 막내의 핑계가 한눈에 다 보였던 것 같다. "우주 너 지금 일부러 가려고 그러는 거지. 다 알아!" 내 계획이 1초 만에 물거품이 되었지만, 돌이킬 수 없어 우기다가 9시 30분쯤 집에 가며 식은땀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의 상황이 동기들에게도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는지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그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이야기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냥 피곤하다고 먼저 들어가 보겠다고 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어린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유연한 생각을 하지 못해 언제나 핑곗거리를 찾았던 것 같다.
중고등학생, 대학생까지는 내가 스스로 선택했던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직장인이 되면서 동기나 팀원 등 새로운 집단에 속하면서 나는 예상치 못한 관계의 내적 어려움을 겪었다. 성향이 다른 사람이나 말투가 다른 사람, 취미가 다른 사람들과도 웃으며 이야기하고 동료와 친구가 된다는 것이 어려웠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술도 잘 마시고, 분위기에 잘 흡수되는 동기들을 보며 '왜 나는 이렇게 적극적이지 못할까? ' 하며 자책한 적도 많다. 나는 그들과 다를 뿐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편했을 텐데, 혹시 내가 너무 소극적일까 걱정하느라 그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지금 다시 신입사원이 되어 동기들과 만나는 시점으로 돌아간다면, 그냥 나답게 행동하고, 어떻게 보일지 걱정하지 않고 내 생각을 잘 표현하며 지냈을 텐데 말이다.
회사에 다니다 보면 이전까지의 내 모습과는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평생 몰랐던 내 모습이 낯설기도 하다. 어떤 순간에는 누구보다 소극적이거나 내성적이다. 가끔은 '도대체 왜 이렇게 말하지? 나에게 대해 무엇을 안다고 이래?'라는 생각에 화가 많아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사회성이 부족한가 자책할 수도 있다. 하지만 8년 차 직장인이 되어 신입사원의 나를 되돌아보니 사람마다 성격은 단지 '다름'이지 '틀린 것'이 아니었다. 활발한 사람이 있고, 조용한 사람이 있다. 술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많은 동기들과 어울리는 것이 편한 사람이 있고, 소수의 동기와 어울리는 것이 좋은 사람도 있다. 이제는 내가 특정한 어떤 직장인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걱정하거나 자책하지 않는다. 내 모습 그대로 친해질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혹시나 신입사원 시절 나의 모습처럼 활발하게 어울리지 못해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작은 위로를 전하고 싶다. 그 모습 그대로 괜찮다고,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또 사랑받을 수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