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와 ‘서울’
왕복 3시간? 힘들어서 어떻게 다녀?
7년 전 첫 직장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 인천에서 몇 시에 출근해?"
"퇴근하면 몇 시야?"
와 같은 물음은 거의 매일 들었던 단골 질문이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인천에서 아침 5시 40분에 일어나 6시 40분에 오는 지하철을 타고 오면 8시까지 도착할 수 있다고 친절하고 자세하게 대답했다.
사실 이렇게 자세하게 대답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렇게 먼데도 맨날 8시까지 오라고 시킨단 말이야?
이게 더 말이 안 되지. 나도 9시까지 오고 싶다고!'
라는 신입사원의 반항과 분노였던 것이다.
신입사원으로 배정받은 팀은 서울 영등포구에 사무실이 있었다. 그나마 서울 중에서는 인천과 가까운 영등포구라서 거리상으로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 8시까지 출근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새벽 6시 전에는 기상을 해야 했다.
거기다가 한 달에 두세 번 돌아오는 당직날은 더 곤욕이었다. 7시까지 회사 사무실에 도착해야 했기에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야 했다.
그렇게 새벽에 일어나 해가 뜨기 전에 인천 1호선을 타고 서울에 오다 보면 업무가 시작하기도 전에 진이 빠지곤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냐? ' 하는 한탄을 하면서 말이다.
회사에 처음 입사한 24살의 겨울,
난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해가 안 뜨는 겨울이 너무나 괴롭다는 것을.
해가 안 뜨는 시간에 아침을 시작하는 것이 무엇보다 기운을 빠지게 한다는 것을 처음 느꼈던 것이다.
인천에서 서울로 출근하는 1시간 30분의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었다.
인천에서 서울,
왕복 3시간의 출퇴근 시간 때문에 바로 서울에 자취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새벽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하면 하루가 다 지나가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그때 당시에는 자취를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나에게 서울은 너무나 멀고 다른 존재였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인천에서 학교를 다녀서 그런지 인천밖에 몰랐던 나에게 서울과 경기도는 새로운 세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회사 선배들과 동기들은 아무렇지 않게 서울 지리와 맛집, 이동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 아 나는 잠실 쪽에 살아서 강남 쪽으로 오는 게 편하지."
"사무실이 그 주변이라 은평구 쪽으로 이사 가려고"
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거기가 어디지?'
라고 몇 번을 생각해야 했다.
한 번은 사무실 팀원 중에 하남에서 영등포로 출퇴근하시는 분이 있었는데 새벽에 출퇴근하시길래
'뭘 그렇게까지 일찍 나오시지? '라고 생각했었다.
입사한 지 1년이 지날 때까지 하남이 인천 주변에 있는 지역인 줄 알았던 것이었다. 이 정도로 지리에 무지하기도 하고, 딱히 찾아보지도 않았었다.
이건 진짜 사는 게 아니다
서울에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한 건 다름 아닌 '이직' 때문이었다.
정들었던 영등포구를 떠나 이직한 회사의 사무실은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해 있었다.
서울 2호선 지하철로 신도림에서 삼성역에 가려면
무려 15개 정거장을 이동해야 했다.
인천에서 서울 1호선 지하철을 타고 신도림까지 간 후, 2호선으로 갈아타고 삼성역까지 도착하는 코스는 생각보다 괴로운 시간이었다.
1호선 15개 역, 2호선 15개 역을 합해 총 30개 역을 통과해야 했다.
'영등포까지도 잘 출퇴근했는데 삼성이라고 힘들겠어?'라고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가장 괴로웠던 건 바로 퇴근시간이었는데, 2호선을 타고 신도림까지 가는 그 길에서 정말 몸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꽉 차있었다.
특히 저녁 6시에서 7시 사이는 한 번에 지하철을 타는 것조차 힘들었다.
최소 2개 정도의 열차는 그냥 보내야만 맨 앞 차례가 되어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그렇게 이직한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문득 '이건 진짜 사는 게 아니다.
나도 자취를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첫 자취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 오로지 직장을 잘 다니기 위해 자취를 시작했다.
아마 인천에 있는 회사에 취업을 했다면 평생 서울로 이사 올 일은 없었을 것 같다.
서울은 나에게 멀고 어려운 도시였다.
반 강제적으로 서울에 자취를 시작하면서 시골쥐가 서울로 상경하는 것처럼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했다.
전입신고를 하고 나서 주민등록등본을 발급해서 보니
나의 주소지가 서울로 변경된 게 신기하기도 했다.
한평생을 인천에서만 살다가 처음으로 타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겨서 그런지 뭔가 인생 제2막이 시작되는 것 같다는 기대감도 들었다.
하지만 나의 서울 살이는 '직장'이 있기 때문에 유한한 것이었다.
만약 회사에서 잘리거나,
회사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거나,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서울에서 짐을 싸고 나올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인지 '내가 서울에서 자취를 하는 이유는 회사를 위해서야. 회사에 충실해야 본적을 뽑아'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자취를 시작하고 친구들을 만나면 친구들은 항상 "자취하니 어때? "라고 물어봤다.
나는 언제나 "회사랑 가까워서 좋아. 회사에 가는데 30~40분 밖에 안 걸려. "라고 대답했다.
서울의 사는 목적이 회사뿐이었던 것이다.
안국역에 간장게장 먹으러 갈래?
그런 내가 회사에서 벗어나 서울 도시 자체를 사랑하게 된 계기는 놀랍게도 음식 때문이었다.
너무 먹보처럼 보일까 걱정되지만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하기 전에는 딱히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어디에 맛있는 음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분명 멀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 서울에서 자취를 하게 되니 종로부터 시작해서 홍대, 강남, 성수, 잠실 등 맛있는 음식이 있는 곳이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지하철 노선도를 켜고 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특히 한동안은 종로구에 빠져있었는데, 시원한 가을 선선한 바람이 불 때 안국동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돌아다닐 수 있는 여유가 정말로 좋았다.
"안국역에 먹고 싶은 간장게장 전문점이 있는데 너무 맛있어 보여. 이번 주말에 갈래?"
라며 친구와 갑작스럽게 약속을 잡고 광화문과 경복궁을 구경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서울에서 자취를 하지 않았더라면 인천에서 서울 종로구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해야 하고 직장인의 주말 하루를 온전히 쏟아야 하기 때문에 도전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에서 살게 되니 서울 어디든지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볼 수 있다는 '여유'가 생긴 게 참 좋았다.
분명 서울은 복잡한 도시임에 틀림없다.
출퇴근 시간에 사람들은 엄청나게 붐빌 때면'와 진짜 사람 많다'라는 놀라움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서울의 특색 있는 아름다운 거리와 건물을 구경하고, 취향을 찾아가며 맛집을 탐방하다 보니 '서울'에 살아 좋은 점이 하나둘씩 느껴진다.
서울에 살기 전까지 나에게 거주지는 단지 어딘가를 가기 위한 곳이었다.
중고등학생을 지나 대학생까지는 단지 학교를 가기 위해 지냈었고, 취직을 한 이후에도 회사를 출퇴근하기 바빴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거주지는 안목과 취향이 쌓아가는 공간이 되었다. 나만의 취향이 생기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줄이야.
물론 단점도 있다. 먹고 먹어도 맛있는 맛집이 계속 나와서 살이 찐다는 것!
아 주말에 뭐먹으러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