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와 '감정'
너네 아빠 또 운다. 몇 번을 봐도 슬픈가 봐.
2006년에 개봉한 영화 '미녀는 괴로워'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날은 아빠가 우는 날이었다. 영화 마지막 클라이맥스에 김아중이 콘서트를 하며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장면이 있다. 성형수술 후 사람들을 속이고 탑스타가 될 수 있었던 그녀는 이렇게 고백한다.
"여기에 제니는 없어요.. 제니의 노래를 듣고 싶어서 오신 분들은 나가셔도 원망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혹시 한나의 노래를 듣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한 번만, 한 번만 들어주세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정한 자신을 밝히고 치매기가 있는 아빠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김아중의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다. 이 장면에서는 눈물이 찔끔 나온다. 그러다 옆에서 같이 영화를 보는 아빠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빠가 눈물 콧물 흘리고 있는 것었다.
눈이 시뻘개진 체로 영화를 보고 우는 아빠의 모습은 낯설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족 다 있는데 울면 창피하지는 않으실까?'
'미녀는 괴로워' 영화는 대 히트를 쳤다. 그래서인지 텔레비전에서 재방영을 많이 해줬다. 내가 본 것만 3번은 더 된 것 같다. "너네 아빠 영화 보고 또 운다. 소녀 같네."
아빠는 몇 번이고 그 영화를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분명 이때쯤 이 장면이 나올 걸 알 텐데, 그럼 덜 슬플 것 같은데도 아빠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이게 울 일이야?
자취하기 전 가족과 한 집에 살 때 나는 웬만해서 울지 않았다. 20대가 된 이후에는 소리 내서 펑펑 울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별이 힘들 때에도, 원하던 직장에 들어가지 못할 때도, 회사가 힘들 때도 마음 놓고 힘들어하진 못했다. 팅팅 부은 눈으로 가족을 만나야 하고 같이 밥을 먹어야 했다. 그러다 보면 "무슨 일 있어? 왜 울어? "라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이런 걸로 울면 안 되지. 잊어야지"라는 조언과 충고를 듣게 된다.
현재의 내 감정과 왜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됐는지 '설명'해야 했다. 나는 감정을 설명하기가 싫어서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감정을 절제하려는 다른 이유는 감기처럼 감정도 집에서 옮기 때문이었다.
가족과 한 집에 같이 살면 어쩔 수 없이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생각도 옮고, 감정도 옮아간다.
슬픔과 기쁨 그리고 분노까지 말이다. 그나마 기쁨은 낫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하지만 슬픔과 분노가 옮으면 위험해진다.
대표적인 게 바로 '부부싸움'이 아닐까? 기분 좋게 집에 들어왔다가도 엄마 아빠가 싸우는 날에는 기분이 확 내려앉는다. 눈치가 보이고, 행동은 슬금슬금 느려지며 결국 방 안에 들어가서 귀를 막게 된다.
어렸을 때는 무서웠지만, 성인이 된 다음부터는 싸움이 나면 오히려 화가 났다.
'아 듣기 싫어도 내가 왜 이걸 들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며 화가 났지만 , 시간이 지날수록 '이건 엄마가 맞는 거 같은데 왜 서로 이해를 못 할까?' 라며 이제 내가 솔로몬이 된 듯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눈물은 생각보다 빨리 마른다
그러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감정을 공유할 사람이 없어졌다. 자취방이라는 공간 안에 나만 있었기 때문에 감정이 옮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감정이 오롯의 나의 것이 되어 버렸다.
자취방에서 나는 울기도 많이 울었다.
회사에서 다른 직무를 옮기려고 면담을 하던 날이었다. 나의 열정을 맘껏 발산하고 와야겠다는 처음 다짐과 다르게 분위기는 흘러갔다. 옮기고 싶던 팀의 팀장님은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객관화를 시켜보세요. 상, 중, 하 중에 어느 정도인가요? "라고 물으셨고, 계속되는 추궁에 나는 점점 입술이 말라갔다.
"이 일을 하다가 그만두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잘 생각해 보고 다시 연락 주세요."라는 마지막 말을 듣고, 나는 풀이 죽은 모습으로 " 네 알겠습니다." 라며 자리를 일어섰다.
그날은 비가 참 많이 왔고, 운동화가 다 젖은 채로 집에 돌아오자마자 우울한 감정이 쏟아졌다. 비에 홀딱 젖은 옷을 비틀면 물이 쫙 나오는 것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너무 우울해서 자취방의 전등을 끄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왜 이렇게 쏘아붙이는 거야.'라는 서러움으로 시작된 눈물은 나중에 나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되지도 않을 일로 괜히 시작한 내가 바보지.'
그날 자취방에서 대놓고 펑펑 울었다. 이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정말 왜 저래?'라고 할 정도로 소리 내서 서럽게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만약 가족과 함께 살았다면 그렇게 크고 길게 울 수 있었을까. "그냥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라고 이야기하고, 방 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누워있는 게 전부였을 것이다. 어쩌면 팀을 옮기는 것도 확정이 되기 전까지는 굳이 걱정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은 생각에 티를 내지도 않고 저녁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는가? 생각보다 눈물은 빨리 마른다.
처음에는 너무 서글퍼서 눈물이 펑펑 났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눈물이 메말랐다. 눈이 건조해져서 세수를 했다. 세수를 하니 배가 고파서 배달 앱을 켰다. 그렇게 '짜증 나는데 먹고 싶은 거나 먹자'라고 혼잣말을 하며 신전떡볶이를 시켜 먹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 마셨다. 눈물의 끝은 결국 음식이었다.
감정을 공유할 사람과 공간이 없다
나는 "괜찮아"라는 말을 달고 살던 사람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아도, 슬픈 일이 있어도 대부분 무덤덤하게 "뭐 괜찮아"라고 넘어간 적이 많았다.
화나는 감정, 신나는 감정, 두근대는 감정, 슬픈 감정은 그저 남들에게 적당히 공유할 만큼만 느끼고 살았던 것이다.
자취는 그렇게 나의 잠잠했던 감정을 세상으로 끌어다 놓았다. 아침이든 낮이든 밤이든, 심지어 새벽까지 자취방은 자유로웠다. 자기 전에 유튜브를 켜고 재밌는 영상을 보면 혼자 껄껄껄 신나게 웃는 날도 많았다.
회사에서 화 나는 일이 있는 날에는 집에서 씩씩대며 마음껏 분노하기도 했다. 울다가 웃는 자연스러운 감정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나의 감정만 신경 써도 되는 환경이 좋았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엄마 아빠의 싸움과 동생의 하소연, 그리고 그 사이에서 투정 부리는 내 모습을 보지 않아도 돼서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부작용도 있었다. 깊어지는 감정에서 헤엄쳐 나와야 하는 것도 나 자신이었다. 아무도 끌어줄 수가 없었다. 자취방에 앉아서 혼자 생각하다 보면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회사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는 그 생각이 밤까지 이어졌다.
'왜 이 사람은 항상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할까? 정말 이상하다.'
뉴스를 보고 세상에 이런저런 사건사고를 볼 때는 가슴이 먹먹해져 새벽까지 슬퍼졌다.
'나에게도, 우리 가족에게도 이런 사건사고가 일어날까? 너무 무섭다.'
가끔은 월세를 내는 현실이 막막해져 먼저 자리를 잡은 친구들과 끊임없이 비교를 하기도 했다.
'나만 아직도 여기서 제자리구나. '
특히 슬픔이나 두려운 감정은 빨리 사라지지 않았다. 주변에 누구라도 있다면 가볍게 이야기하고 훌훌 털 수 있는 감정이었지만, 혼자 있을 때면 그러지 못했다. 그 감정이 세상의 전부인 것 같았다.
울지 말고 일어나 피리를 불어라
감정이 휘몰아칠 때 내가 하는 건 다름 아닌 '환기'였다. 낮이든 밤이든 잠깐 창문을 열었다. 새로운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오면 코 끝이 시원해진다.
" 아 좋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공기가 바뀌면 감정의 온도도 변하는 듯했다. 너무 무거운 감정은 바람에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우선 씻는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샤워까지 하고 나면 말끔해진 정신으로 돌아온다. 물론 씻을 때도 그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래도 씻고 나오면 또 다른 할 일이 생각난다. 청소를 하기도 하고, 노트북을 켜기도 한다. 설거지를 하기도 하고, 어쩔 때는 침대에 뛰어들어 바로 자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남은 시간을 시작한 것이다.
영화관에서 슬픈 영화를 볼 때는 눈물 콧물이 다 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상영관의 불이 켜지면, 그때는 재빠르게 영화관을 빠져나온다. 배가 고파서 음식점을 찾기도 하고, 영화 보는 내내 참았다가 화장실로 달려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쏙 들어가고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
그렇게 다시 감정을 딛고 일어서야 했다.
나는 내 감정의 기복이 너무 커져서 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까봐 너무 많은 감정을 누르고 살지 않았나 싶다. 오히려 내가 느낀 그 감정을 설명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쏟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자취를 하며 조금씩 내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표출할 수 있었다. 친구들이나 가족 앞에서 울면 너무 창피하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와는 달리, 이제는 어린아이처럼 마음껏 엉엉 울 수 있었다.
마음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내 감정을 잘 보살펴줘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웃기면 깔깔대면 웃고, 슬프면 유별나게 울기도 하고 말이다.
'미녀는 괴로워' 영화를 보며 눈물을 훔치던 아빠의 모습은 가족 앞에서 울어서 창피한 게 아니다. 괜히 눈물이 난다고 화장실로 숨을 일도 아니었다. 이번에 부모님 집에 가서 슬픈 영화를 같이 보면 나도 옆에 휴지를 가져다 놓고 아빠와 같이 펑펑 울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