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와 '단골 가게'
오늘은 커피 대신 고구마 라떼 줄게요.
짧으면 몇 주, 길면 몇 달의 주기로 돌아오는 날이 있다. 바로 '퇴사 욕구'가 넘치는 날이다. 언젠가 책에서 본 적이 있는데 직장인은 3년마다 슬럼프가 온다고 했다. 3년, 6년, 9년.. 이렇게 말이다.
난 그 말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3년은 솔직히 너무 길지 않는가.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에 투입이 되면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적이 있다. 몇 백 개의 프로그램 화면의 담당자가 내 이름이었다. 양치를 하다가도, 출근을 하다가도, 점심을 먹다가도 일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왔다.
'내가 이걸 꼭 해야 하는 걸까?'라는 푸념이 뇌를 덮고 있으니, 표정에서도 드러난 것 같다.
그날도 바로 그날이었다.
퇴사 욕구가 넘치는 날, 도저히 저녁을 차려먹을 기운이 나지 않아 자취방 주변에 있는 샐러드 가게로 향했다. 그리고 평상시처럼 연어훈제 샐러드를 주문했다.
사장님은 내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눈치 체셨는지 물었다.
"우주 씨, 무슨 일 있어요? 기운이 없어 보이네."
표정 관리를 잘하고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나 보다.
나도 모르게 "회사 일도 바빠서 그런지 기운이 없어요. 지쳤나 봐요."라고 속마음을 말해버렸다.
정말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힘들다거나 지친다는 말을 잘하지 않는 편인데, 그날따라 사장님에게 털어놓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자 사장님은 샐러드를 봉지에 담으면서 분주히 움직이셨다. 나름 단골손님이라고 갈 때마다 커피를 공짜로 주셔서 미안한데 또 주시려고 준비하시는 것 같아서 재빠르게 이야기했다.
"사장님 오늘 커피 많이 마셔서 괜찮아요. 안 주셔도 돼요."
그러자 사장님은 "우주 씨, 오늘은 커피 말고 달달한 고구마 라떼 마셔요. 이거 먹고 기운 내요."라고 따듯한 고구마 라떼 한잔을 건네주셨다.
평상시에는 아메리카노 말고는 거의 마시지를 않지만,
그날따라 주신 고구마 라떼가 얼마나 맛있던지 아직도 그 맛이 기억난다.
한 입을 마시는데 마음이 녹아내린다.
두 입을 마시니깐 마음이 풀린다.
그렇게 한 입씩 마시다 보니 금방 다 마셨다.
다 마시고 나니 위로가 된다.
회사 일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힘든지, 어떤 사람이 나를 화나게 하는지, 그래서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인지 하나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샐러드 가게 사장님이 주신 고구마 라떼에 우울함이 녹아내려갔다. '이런 게 위로구나'라는 걸 처음으로 느낀 하루였다.
난 단골이 딱히 없는 것 같아
그 샐러드 가게는 28년 내 인생 처음으로 살면서 처음으로 '단골'이라는 명함을 달게 된 곳이다.
그전까지는 단골이 하나도 없었다.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주 가는 미용실의 디자이너가 미용실을 옮기면 따라가서 머리를 자르기도 한다고 한다. 나는 미용실은 항상 회사나 집 주변에 그냥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머리를 잘랐다.
조금 비싼 파마를 해야 할 때는 네이버에 첫 예약으로 할인을 받아가면서 그때그때마다 미용실을 골랐다.
음식점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음식에 감동받거나 예민한 편이 아니어서 아무 음식이나 끌리는 대로 먹었고, 재 방문하는 곳도 적었다. 그나마 자주 먹는 것은 치킨이나 떡볶이, 피자 등의 프랜차이즈 배달 음식이었으니 단골이란 개념이 무색했다.
자취를 시작하고 일 년 후쯤 집 앞 골목에 프랜차이즈가 아닌 샐러드 가게가 생겼다.
평상시에 저녁으로 샌드위치를 자주 사 먹곤 했는데 집 앞에 생기니 너무 궁금했다.
가게가 오픈하자마자 찾아갔는데 50대 부부 사장님이 어찌나 반갑게 맞아주시던지.
처음 본 사람에게 내향적인 나였는데, 나도 모르게 쿠폰까지 만들고 와버렸다.
그러다 찐 단골이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 네이버 블로그에 후기를 작성하면서부터다. 음식이나 여행 리뷰를 올리는 작은 블로그에 샐러드가 너무 맛있다고 추천 글을 올렸는데, 그걸 사장님이 보신 모양이었다.
다음에 방문하니 "이거 우주 씨가 쓴 거 아니에요? 저 이거 보고 너무 감사했잖아요. 그래서 우리 남편에게 평생 우주 씨 오면 커피 공짜로 주자고 했다니깐요."라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이야기하셨다.
내 블로그가 유명한 블로그도 아니었는데 좋아해 주시니 뿌듯한 마음과 함께 약간 경계심을 가지던 내 마음도 스르르 녹아내렸다. "사장님이 너무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주시니 올릴 수밖에 없죠~"라고 말하며 그날부터 나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평상시에 친한 친구나 가족이 아니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싫어했다. 지금도 회사 동료에게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소한 이야기라도 말하기 시작하면 퍼지는 것이 싫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가 샐러드 가게 사장님 앞에서는 "이번 주에는 회사 반차를 써서 인천 다녀왔어요."부터 시작해서 "이번에 새로 아르바이트생 온 거예요? 어때요 사장님하고는 잘 맞나요?"라고 사장님의 가게 사정까지 묻기 시작했다.
요즘 무슨 일 있으셨어요? 잘 안보이시길래요.
단골이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안정감을 주었다. 서울에 혼자 자취를 시작한 동네에는 친구나 가족이 한 명도 없기에 정말 '나 혼자'라는 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당장 내가 사라져도 누구도 모를 수 있겠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나를 더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에 방어적인 태도로 지냈던 것 같다.
그러다 집 앞에 언제든지 나를 반겨주는 단골 가게가 생기고 나니, 친밀함과 애정이 생겼다.
사장님이 바빠 보이시면 내가 좀 더 기다리더라도 괜찮으니 천천히 달라고 하고, 근처 마트에 가서 박카스를 사서 드리기도 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배달은 어떡하냐고 같이 걱정하기도 했다.
그렇게 단골은 단순히 많이 소비하는 곳이 아니라 마음을 여는 '이웃'이었다.
그 뒤로 샐러드 가게 외에도 자취방 근처에서 도장 깨기를 하듯 조금씩 단골 가게가 늘어났다.
2년간 다닌 헬스장 사장님은 나를 항상 반갑게 맞아주시며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회원님." "머리를 자르셨네요. 진짜 잘 어울리시는데요? "라고 관심을 가져주셨고, 바빠서 자주 못 간 주에는 "요즘 무슨 일 있으셨나요?"라고 안부를 물어주시기도 했다.
시장 근처에 있는 돈가스 가게도 단골이 됐는데 갈 때마다 "오늘은 맛있게 드셨어요? " "오늘도 밥은 빼드릴까요?"라고 기억해 주셨다. 그럼 나는 "오늘도 너무 맛있어요. 데리고 오는 친구들마다 다 너무 맛있다고 하네요."라고 하며 따봉을 외치며 대답했다.
그렇게 가족도 친구도 없는 서울 자취방에서 나는 단골 가게가 생기고 안부를 묻는 이웃이 생기며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자취를 하기 전에는 어떤 음식점이나 가게에 가든 일회성으로 방문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을 열고 '이웃'을 맞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절친한 친구처럼 깊은 이야기를 나누진 않더라도, 안부를 묻고 반가워하는 관계가 참 소중했다. 왜 어른들이 '이웃'을 그렇게 반가워하고 '단골 가게'를 찾아가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매우 개인주의 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누구보다 이웃을 반가워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자취를 통해 친구, 회사 동료, 가족 외에 이제는 '단골'과 '이웃'이라는 관계도 추가됐다. 인간관계가 더욱 넓어지고 풍성해진 기분이다.
추석 때 배가 터지게 많이 먹었으니, 당분간은 샐러드 가게 사장님을 자주 만나야 할 것 같다.
만나면 한 마디 하시겠지.
"우주 씨 얼굴이 포동 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