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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창 신부범 Aug 28. 2020

술김이었지만 값진 선택에 후회는 없다

술김에 지갑을 열면 후회를 한다지만...

늦은 밤 술 취한 젊은 여성이 경찰의 손에 이끌려 파출소로 들어온다. 비틀비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만취한 그녀는 조서 담당 경찰 앞에 앉아 혀가 꼬인 말로 '횡설수설' 신세 한탄을 늘어놓으며 한숨을 크게 내쉰다. 그 사이 술에 취해 자고 있던 한 남성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는 밑도 끝도 없이 '국가가 나에게 해 준 게 뭔데,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며 '곤드레만드레' 세상을 향한 불만의 소리를 버럭 내 지른다.


이상은 2009년 11월 15일부터 2010년 6월 6일까지 인기리에 방영된  KBS 개그 콘서트 <나를 술 푸게 하는 세상>의 한 장면이다. 이 코너는 술에 취한 취객들이 경찰서에 끌려와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 이야기였다. 당시 개그맨 박성광이 외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은 큰 화제를 몰고 오기도 했다. 비록 술에 취해 내지르는 말이었지만 '일등 지상주의 대한민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정확히 끄집어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시청자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샀다.


술버릇을 개그로 풍자해 시청자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했던 이 코너에 출연했던 개그맨 박성광과 허안나의 술버릇 연기는 압권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유형의 술버릇일까? 술버릇이란 술을 마신 뒤에 부리는 좋지 않은 행동 따위를 말하는데 사람마다 유형이 제각각이다.


술만 먹었다 하면 사람들과 싸우려 드는 '시비형'이 있는가 하면 술만 먹었다 하면  했던 말 또 하고 하는 '무한 반복형'이 있다. 여기저기 전화를 해대는 '텔레마케터형,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고성방가형'도 있다. 그리고 술만 취하면 우는 사람, 잠자는 사람, 갑자기 사라져 없어진 사람 등등 술버릇의 유형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래서 술을 가끔씩 즐겨 먹는 나라고 술버릇이 없을리 없을 것이다. 나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보고 주위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나는 기분파 유형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술만 먹었다 하면 '세상이 전부 내 것인 양 우선 기분부터 내고 보는 기분파 유형 말이다.


기분파 유형의 경우 의학적으로 살펴보니 알코올이 기분을 좋게 하는 엔도르핀,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시키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다'라고 한다. 다시 말해 술이 대뇌의 도파민계 와 오피오이듯계를 활성화시켜 쾌락을 부르게 돼 기분파로 돌변하는 유형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문뜩 생각이 나는 게 있다.


2018년 4월이다. 꽃 피는 봄, 계절이 계절인 만큼 '선남선녀'들의 결혼도 유난히 많은 계절이기도 했다. 조카 또한 3년간 교제한 직장 동료와 눈이 맞아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하며 살겠다' 약속하며 결혼식을 올렸다. 평생을 같이 할 운명의 반려자를 만나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위한 축복의 자리인 전라북도 남원까지 달려가 '이 녀석 잘 살아라, 그렇지 못하면 넌 내 손에 죽는다'라는 협박성 축하를 마음껏 해 줬다.


그리고 올라오는 길, 화장실을 가기 위해 어느 휴게소에 들렀다.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4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두 분이 '아저씨 잠깐만요' 하고 나를 부른다.'왜 그러시죠?라고 물으니 자신들은 어느 후원단체 소속이란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한 후원 모금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결국 매월 일정 금액의 후원을 약정하는 서류였고 조카의 결혼식에 이미 몇 잔의 술을 기분 좋게 기울인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이라면 당연히 후원해야죠?'라고 맞장구쳤다.


물론. 술 먹은 상태였지만 사리분별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매월 일정액의 금액이 빠져나간 만큼 아주머니들이 말한 후원단체가 공식 단체인지 미심쩍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벌건 대낮 고속도로 공중 휴게소에서 대놓고 사기 치지는 않겠지?라는 믿음으로 후원 서류에 사인을 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그날 후원 약정서에 사인을 해 준 것은 당시 기분에 취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매월 얼마 만의 금액이라도 후원금으로 내야겠다'는 평소 생각을 실천에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날 그 일은 술김에 한일이라지만 내 생애 값진 선택으로 생각된 만큼 후회는 절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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