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계획과 다이어리
글·사진 황소연
SNS에서 한 어린이의 생활계획표를 보았다. ‘밖에서 놀기’, ‘친구와 놀기’, ‘장난감 갖고 놀기’ 등 때와 장소는 다르지만 결국 ‘놀이’에 초점이 맞추어진, 핵심만 남긴 훌륭한 계획표였다. 생각해보면 계획을 세울 때 나는 늘 선생님이나 친구들, 부모님, 심지어 TV에 나오는 멋있는 사람들의 그것을 따라가려 노력했고, 결과는 당연하게도 늘 ‘망했다’. 저마다의 매혹적이고 멋진 계획을 접하다 보면 정작 나는 지쳐버렸다. 전부터 새해 새롭게 마음가짐을 가다듬는다는 해돋이 보기에 전혀 욕심이 없었다.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한 새해 인사나 연말 분위기도 영 껄끄러웠다. ‘어차피 안 될 텐데’, 하는 마음이 나를 지배했다. 차라리 편해질 수 있었던 그 찰나에 다시 나의 마음을 뒤흔드는 건 다이어리였다. 새 다이어리를 사면 잠깐이지만 계획을 잘 지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위클리, TO-DO 리스트, 스터디플래너(내가 이 물건을 사용했다니 놀랍다) 등 형태는 달랐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하는 계획을 모방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동원했다. 새해가 되면 나도 모르게 늘 다이어리와 일기장, 필기감이 좋은 펜 등을 장만했다. 스타벅스의 프리퀀시를 적립해 다이어리를 수령하는 건 한국의 전통문화로 보일 정도였다. 열정적인 ‘다꾸’를 위해 맘에 드는 다이어리 및 수첩을 수소문했고, 취향에 맞는 스티커를 구매했다. 송년회 자리에선 친구들이 무슨 계획을 세우는지 귀를 기울였다. 그 앞에 내세우기엔 내 계획이 초라해 보여 굳이 말하진 않았다. 책 몇 권 읽기, 운동 배우기, 요리 하기…. 머릿속은 즐거운 상상으로 가득했지만, 즐겁기만 한 계획들은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보통 1월 1일을 기점으로 새로운 것을 시도하거나 이제까지 박차를 가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힘차게 시작하다가도 점점 설날 이후로, 새 학기인 3월로, 여름이 시작되는 5월로 밀려났다. 그러다가 라디오나 TV에서 들려오는 건 “벌써 ○○○○년도 절반이 지났는데요! 여러분은 연초 세우신 계획을 얼마나 지키셨나요?” 같은 말. 죄송합니다. 저는 안 되나 봐요. 지난해에 세웠던 상세 새해 계획을 살펴보니, 실천한 것이 ‘다양한 술 맛보기’ 정도뿐인 나 스스로가 어이없게 느껴진다. 결국엔 제일 좋아하는 것만 하게 되는 걸까.
도라에몽처럼 온갖 물건을 품고 사는 나는 꽤 오래전의 다이어리도 갖고 있다. 문득 옛날에 사용한 다이어리를 들춰본다. 봐서는 안 될 것을 열어본 기분이다. 뭐? 이런 계획을 세웠다고? 차례로 살펴보면서 오랜만에 ‘추억팔이’를 했다. ‘올해 안에 집에서 나가기’. 음, 각종 마찰이 있었지만 그런대로 성공했다. 모든 계획이 좋은 방향으로만 풀리지 않음을 배웠으니 됐다. ‘문신하기’. 용기가 없어서 실패했다. ‘해외 직구하기’. 대행업체를 낀 것도 직구라면 성공했다. 단골 실패 항목인 ‘꾸준히 운동하기’는 익숙하니 패스. ‘코딩 배우기’는 왜 적어둔 걸까? 어느 해의 시작에는 다이어리의 첫 장에 ‘생존’이라는 목표를 적기도 했다. ‘요가하기’. 3주에 한 번 한 것도 인정이 될까? 놀기, 술 마시기, 친구들과 노래방 가기 등, 나의 현재로 올수록 비교적 지키기 용이한(?) 계획의 비중이 많아진다. 꾸준히 지킨 것은 일기 쓰기 정도이지만, 성찰이나 고민이 담긴 글이라기보다 현상에 대한 기록에 가깝다. 오늘은 무엇을 얼마나 먹었는지, 어떤 스트레칭을 몇 분 했는지, 친구와 어디서 만났는지, 어떤 가사노동을 했는지 등이다. 평범한 일상을 꾸리는 데에 집중하다 보니 연초 세웠던 계획이나 버킷리스트는 온데간데없다.
소화하지 못할 계획을 잔뜩 꿈꾼 뒤 연말엔 대충 버무려서 ‘이 정도면 됐지 뭐.’ 하는 것은 나의 숙명일까? 몇 번의 다이어리를 내 흑역사의 뒤안길로 보냈는데도 이 버릇은 고쳐지지 않는 것 같다. 버킷 ‘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해에 하나의 계획만 세우는 것이 유행이 됐으면 좋겠다. 거기에 슬쩍 편승해서, 실패한 내 흑역사들이 묻어갈 수 있도록.
위 글은 빅이슈 1월호 21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