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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un 07. 2020

[밤에 읽어주세요] 밤, 숲, 시


글. 김현     


1

출처: 픽사베이


두 사람은 마리앙바드에서 차로 20분은 더 가야 도착하는 해변 마을에서 처음으로 마주쳤다. Y는 그의 어머니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 O는 구상 중인 작품 때문에 취재차 그곳을 방문 중이었다. Y가 여전히 우아하고 수다스러운 여인과 식사를 막 시작했을 무렵에 O는 목소리 박물관으로 들어섰고, Y가 어서 이 불편한 만찬을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O는 델핀 클레르 벨티안 세리그의 목소리를 재생하고 있었다.


델핀 클레르 벨티안 세리그(1932~1990). 알랭 레네 감독의 영화 <겨울 버찌>에서 ‘죽음’ 역을 맡으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자크 드미의 <춤추는 염소들>에서 마리아 역을, 칼리스토 맥널티의 <물결>에서 비디오 아티스트 캐롤 역을, 루이스 부뉘엘의 <대령의 만찬>에서 미국에서 온 여인 패트리샤 역을 맡아 연기했다. 1980년에는 영화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위한 대화>를 직접 만들었고, 시몬 드 보부아르 시청각 센터를 설립했다.


O는 팸플릿에 적힌 짤막한 소개 글을 눈으로 읽으며 델핀 클레르 벨티안 세리그와 M의 전화 통화 내용을 듣기 시작했다. Y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고 나이프를 내려놓은 후 잔에 남아 있던 와인을 단숨에 마셨다. Y의 어머니는 그런 Y가 익숙한 듯 냅킨으로 입을 닦고 진주 귀고리와 실크 스카프를 매만진 후 가방을 들고 일어나 Y의 뒤를 따랐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어요?”

“아직요.”

“시간을 봐요.”

“먹어야죠.”

“특별한 게 있던가요?”

“당신은요?”

“이상했어요. 시간은 뒤죽박죽이고 주고받는 대사도 없잖아요. 내레이션뿐이고.”

“여자는 내면의 소리를 말하고, 남자는 기억의 소리를 말하는 거예요.”

“연인은요?”

“침묵하죠.”


두 사람의 말을 수첩에 적던 O는 문득 자신이 종일 I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I에게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두 사람은 침묵 중이었다. 들을 수 없는 목소리에 관한 델핀 클레르 벨티안 세리그와 M의 대화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았다.(중략)


4

사랑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에 속을 뿐. 당신과 나, 연인은 침묵 속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알리는 두 개의 탁상시계를 탁자 위에 마주 보게 올려둔 뒤 연인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 탁자 아래 펼쳐진 흰 보자기, 그 보자기 위에 잘린 손가락, 알과 돌, 검은 우산, 초콜릿, 파이프 담배, 뿌리와 썩은 과일, 깃털과 반지를 올린 후에 사랑의 박물관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 박물관 한쪽에 나란히 선 연인의 머리 꼭대기 위에 검은 후폭풍을 올려두고 나서 ‘시작하는 연인들을 위해’라고 이름 붙인다. (다음 호에 계속)     


김현 

읽고 쓰고 일한다. 시집으로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산문집으로 <걱정 말고 다녀와> <질문 있습니다> <아무튼, 스웨터> <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이 있다.      


위 글은 빅이슈 6월호 22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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