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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ul 27. 2020

[서울미감유감] 법이 지은 건축


글 l 사진. 신지혜     



가수 남진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평생 살고 싶”다고 노래했다. 그러나 그림 같은 집을 꿈꾸며 초원 위 땅을 산 사람은 집을 짓지 못했다. 초원 위 토지의 지목이 ‘임야’였기 때문이다. 


지목은 토지를 현재 어떤 목적으로 쓰이고 있는지에 따라 나눈 가장 기초적인 분류로, 우리나라의 모든 토지는 대, 전, 답, 임야, 과수원, 목장용지, 염전, 공장용지, 주유소용지, 종교용지 등 28개의 지목으로 나뉜다. 도시에 건축물이 들어선 대부분 토지의 지목은 대이다. 전과 답은 농작물을 재배하는 토지, 임야는 다년생 식물이 식재된 토지이다. 초원 위 임야로 분류된 토지에 님과 함께 살 집을 짓기 위해서는 지목을 임야에서 대지로 변경하는 허가를 받는 등 일정 요건을 갖춰야 한다.(중략)



건축법이 만든 풍경

건축 설계 실무자는 설계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토지에 적용되는 건축 법규를 검토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토지는 앞서 말한 지목 외에도 수많은 건축 법규에 의해 건축 행위가 제한된다. (중략) 어떤 법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법은 도시의 미관을 위해서, 어떤 법은 사용자의 안전을 위해서 존재한다. 대부분의 토지주는 더 넓은 면적을 가진 더 높은 건물을 짓고 싶어 하는데, 이런 개인의 욕망을 조율하는 것도 건축 법규의 몫이다. 


토지 위에는 건축 법규에 의해 그어진 보이지 않는 선들이 있다. 건축물의 형태는 건축 법규가 그린 가상의 선에 영향을 받는다. 토지의 면적이 작을수록, 지어져야 할 건물의 밀도가 높을수록 법이 그린 선의 영향이 커진다. 때로는 법규가 그린 선이 그대로 건물의 외곽선이 되기도 한다. 


3층이나 4층부터 계단처럼 층층이 단을 지으며 후퇴하는 형태의 5~6층짜리 건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건물의 형태에 영향을 준 법규는 건축법 제61조, ‘일조 등의 확보를 위한 건축물의 높이 제한’이다. 이 법은 주거지역에서 건축물을 지을 때, 주변 건물의 일조권을 보호하기 위해 건물의 높이를 제한한다. (중략) 일조권 제한선 안에서 계단처럼 층을 지어 벽면이 뒤로 물러서도록 처리한 건물이 있는가 하면, 기울어진 경사면으로 처리한 건물도 있다. 건축법 제61조가 만든 도시의 풍경이다. 


건축 법규는 건축 설계의 출발점이자 전제 조건이다. 제한된 조건 안에서 좀 더 효율적이고, 좀 더 아름답고, 좀 더 경제적인 건물을 만들기 위해 건축가들이 창의적인 해법을 도시에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명 건축가가 설계하지 않은 평범한 건물들도 건축 법규의 제한을 지키며 설계된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아름답고, 안전하기 위해, 건물이 어떠해야 하는지 시민들이 공유하는 최소한의 기준에 따라서 말이다. 도시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공간임을 건물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신지혜 

아빠가 지은 집에서 태어나 열두 번째 집에서 살고 있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건축 설계사무소에서 일한다. <0,0,0>과 <건축의 모양들 지붕편>을 독립출판으로 펴냈고, <최초의 집>을 썼다. 건축을 좋아하고, 건축이 가진 사연은 더 좋아한다. 언젠가 서울의 기괴한 건물을 사진으로 모아 책을 만들고 싶다. 건축 외에는 춤과 책을 좋아한다.   


위 글은 빅이슈 7월호 23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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