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빅이슈코리아 Sep 23. 2021

[집을 찾다]
삶의 주도권을 찾는 여정

* 알림: 이 글에서는 열림터에 머물렀던 생존자들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인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쉼터 ‘열림터’는 1994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성폭력 피해 생존 여성이 집을 나와 갈 곳이 없다며 상담소 사무실로 찾아온 것이 계기였습니다. 당시는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매우 낮았고, 생존자 지원 체계도 부실했습니다. 여성이 집을 떠나 홀로 산다는 것도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개소 이후 26년이 흐르는 동안 300여 명의 생존자들이 열림터에 머물며 삶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성폭력과 관련한 여러 특별법이 제정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페미니즘’이란 말을 들어본 지금도 성폭력은 계속 일어나고 있고, 열림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계속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청소년입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성폭력 피해 생존자라면 누구나 생활할 수 있는 곳인데도 왜 열림터에는 청소년의 비율이 높을까요? 열림터 생활인 중 약 73%가 청소년이었고, 74%는 친족 성폭력 피해 생존자였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가해자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한 가정의 ‘장’으로 여겨지는 아버지가 가해자일 때, 피해를 벗어날 방법은 가족을 떠나는 것 외에는 달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개별 청소년에 대한 지원과 보호를 철저히 가족에게 맡겨두었습니다. 청소년에게는 자립의 권한이 없습니다. 부모의 동의가 없으면 일을 구하기도 어렵고, 집을 계약하거나 휴대폰을 개통할 수도 없으며, 적절한 의료 조치를 받기도 쉽지 않습니다. 폭력의 가해자인 가족을 떠난 피해 청소년들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곳은 쉼터뿐입니다.



폭력의 연쇄 고리를 끊기 위한 집 밖의 피난처

친족 성폭력 피해 생존자인 초록은 집을 나가 살아갈 방법을 열심히 검색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열림터를 알게 되어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전화를 했습니다. 초록은 쉼터가 있다는 걸 알고 집을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쉼터의 존재를 모르던 동안에는 폭력을 감내해야 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무무는 폭력 피해를 당하던 집에서 나오기 위해 인터넷에 접속했습니다. 가출한 아이들을 도와준다는 어른을 만났지만, 그 어른은 공간을 제공한다는 빌미로 무무와 다른 청소년들에게 성폭력을 가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경찰이 무무를

찾아냈지만, 무무는 경찰서에 가는 순간까지 ‘집으로 돌려보내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했다고 합니다. 쉼터 건물을 처음 봤을 때 느낀 안도감에 대해서 무무는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 이처럼 집을 떠나 살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있어야만 생존자들이 더 이상 폭력을 겪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집을 나와 열림터로 온 청소년들은 무엇을 할까요? 흔들리지 않는 공간에서 안전한 사람들과 일상을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폭력에 대비하며 초조해하지 않고, 평화로운 일상을 지속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싫어하는 영화는 어떤 장르인지 탐구하고, 나의 재능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며 미래를 계획합니다. 성폭력 피해는 자신의 탓이 아니고, 오롯이 가해자의 잘못임을 듣고, 말하고, 쓰고, 확인받고, 공유합니다. 가족과 협상하기 위한 힘도 기릅니다. 안전한 장소를 제공할 때

비로소 청소년들은 자기 삶의 주도권을 찾아가는 데 집중할 수 있습니다.



안전한 삶, 보호받는 삶에 대한 빈약한 상상력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떠나야 하는 청소년은 많은데, 머물 쉼터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쉼터 숫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쉼터 시스템이 일종의 임시방편이니만큼 청소년들의 욕구를 충족하기에 부족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 청소년 쉼터, 학대 피해 아동 쉼터 등 다양한 종류의 쉼터가 생겼지만 모든 시설이 공동생활을 전제로 합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지내던 사람들이 함께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도 청소년들에게는 공동생활이라는 선택지만 주어집니다. 공동생활에는 무수한 갈등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수반되기 마련입니다. 이를 소화하기 위해 많은 쉼터가 각종 생활 규칙을 정해둡니다. 생활 규칙에 적극 공감하거나 답답해도 참고 살아가는 청소년도 있지만, 규칙에 동의할 수 없어 쉼터를 떠나는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불안정과 위험을 피해 집을 나온 청소년들이 쉼터에도 갈 수 없을 때, 이들은 다시 새로운 불안정에 몸을 맡기게 됩니다.


쉼터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도 쉼터 이외의 주거 대안은 필요합니다. 언젠가 열림터 생활인인 송편이 자신의 미래 계획을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 혼자 살 거예요. 열림터도 좋지만, 그때가 되면 혼자 살아보고 싶을 것 같아요.” 제가 머뭇거리며 우리나라에서 미성년자가 혼자 살 수 있는 방법이 매우 제한적이라고 전하자 송편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왜 초를 치세요!” 하며 저를 타박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왜 송편과 같은 청소년에게 계속 초를 치게 할까요? 왜 집을 떠나려는 청소년에게 쉼터 이외의 대안을 제공하지 않는 걸까요? 제가 가장 많이 들은 이유는 청소년은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하지만 ‘보호’에도 다양한 모습이 있습니다. 함께 살고 싶은 동거인을 고를 수 있는 선택권, 독립된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주거권을 제공하는 것 또한 보호입니다. 특히 쉼터 시스템에서 생활하길 거부하는 청소년이 있다면, 그들이 폭력을 경험하는 가정으로 돌아가거나, 거리로 나가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보호 아닐까요?*


“열림터 생활인은 모두 생존자로서 굉장히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제가 처음 열림터 활동가가 되었을 때부터 줄곧 들어온 말입니다. 이 말은 모든 탈가정 청소년들에게도 적용되는 사실일 겁니다. 폭력이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환경에서 살아남았고, 삶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가장 익숙하던 공간에서 떠나 낯선 환경에서 살아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이 청소년들이 쉼터 이외에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요구한다면, ‘보호’라는 이름으로 거절하지 말고 안전하게 자립할 수 있는 대안을 제공해야 합니다. 생존자의 힘을 믿는다면 안전한 삶과 보호받는 삶에 대한 상상력을 넓힐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한 첫걸음은 집을 나온 청소년에게 다양한 주거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집을 떠난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이 살고 싶은 사회

청소년에게는 안전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집이나 방만 제공하면 만사형통이란 얘기는 아닙니다. 가정 밖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많은 지원이 필요합니다. 위기청소년의 자해 경험은 30.5%, 자살 시도 경험은 20.1%입니다.*


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청소년의 경우 그 비율은 훨씬 높습니다. 청소년이 안정적으로 자신의 일상을 지탱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열림터를 퇴소한 사람들도 주거 지원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계속 언급하고 있습니다. 은서는 ‘서럽지 않은 집, 먹고살기 어렵지 않은 직장, 의지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온이는 ‘버팀목’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만두는 ‘다른 생존자들과 연결된 끈’의 소중함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짚는 점은 나를 지지하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생존자들을 지지하고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 사회가 필요합니다. 생존자들의 도전을 응원하고 실패를 보듬으며 치유를 지원하는 사회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성폭력을 용인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사회 분위기가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삶의 결정권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사회 체계가 필요합니다. 가정과 시설 보호 이외에 다양한 보호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 고민을 함께 할 책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보호’ 개념에 대한 열림터의 고민은 다음 글에서 좀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류수민(2019), <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의 ‘보호’ 개념을 재사유하기>, 열림터 25주년 기념 포럼 <보호의 쉼터에서 삶의 기반을 만드는 공간으로>,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쉼터 열림터.

*황여정·이정민·김수혜(2020), <위기청소년 현황 및 실태 조사 기초연구: 예비 조사 데이터 분석 보고서>,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2021 폴짝기금 인터뷰: ‘서럽지 않은 집, 먹고살기 힘들지 않은 직장, 의지할 수 있는 네트워크’ 가 필요하다는 은서.

*2021 폴짝기금 인터뷰: “잘하고 있어. 너 지금 굉장히 잘하고 있어. 흔들리지 않아도 돼.” 버팀목의 필요성을 말하는 온이.

*2021 폴짝기금 인터뷰: 다른 생존자들과 연결된 끈이 되어주고 싶다는 만두.



글. 류수민(수수)


이 글은 '빅이슈' 259호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 홀로 집에] 나를 감당한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