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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Sep 23. 2021

[빅판 자서전] 할 말은 하는 사람

종각역 5번출구, 김훈재빅판을 만나다 ②

김훈재 님은 원래 기술자였다. 대구에서 볼트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군포, 안산 등지에 위치한 대기업 1차 벤더사에서 일했다. 상경한 지 9년째, IMF 외환위기로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지자 자발적으로 퇴사한 이후 직장을 구하지 못해 거리를 전전하다가 노숙 생활에 접어든다. 그러다 빅이슈를 만났다. 종각역 빅판으로 자리 잡은 지 5년 차, 그에게 빅판은 맞춤옷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는 특유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오늘에 이르게 된 과정을 들려주었다.


노숙하던 때부터 빅판으로 자리 잡기까지 결정적인 순간, 붙잡아준 사람들

지금 신도림역에서 《빅이슈》를 파는 동생이 있어요. 이근철이라고 잠실에서 노숙 생활하면서 알게 됐는데, 선릉역에서 같이 거리 생활을 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요. 둘이 길에서 같이 지낼 때 홈리스들을 돕는 봉사단체 분들을 만났어요. 겨울에 날이 추우니까 커피도 한 잔 주고, 옷이며 침낭, 신발도 가져다주면서 이것저것 도움을 주는 분이에요. 술 많이 마시고 소주병 깨고 이런 사람들은 도와주지 않는데, 재기할 가능성이 보이면 도와주는 거예요. 하루 이틀 보고 그러는 게 아니라 석 달을 지켜보더라고요. 나중에는 주민센터 사회복지과에서도 따라 나오고 그래요. 그때만 해도 저는 주민등록도 말소돼 없고 돈도 한 푼 없이 맨날 시커멓게 해 다녔는데, 저를 관심 있게 보더니 같이 가자고 하대요. 그래서 따라갔더니 고시원에 방을 얻어주는 거예요. 석 달인가 돈을 대주더니 그다음에는 (기초생활)수급자를 만들어주더라고요. 바깥에 있으면 잠도 제대로 못 자잖아요. 처음에 고시원에 들어가서는 이틀이고 삼일이고 잠만 내리 잤어요. 잠이 엄청 잘 오더라고요.

이 과정에서 조 총무라는 분을 만났는데, 지금은 그만뒀지만 그분이 《빅이슈》를 팔아보라고 안내해주더라고요. 처음에는 을지로입구역에서 팔았거든요. 한국전력 건물 앞인데 사람들이 아주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에요. 그러면 책이 잘 팔려야 하는데, 하루에 열 권을 못 파는 거예요. 적게는 다섯 권 많으면 여덟아홉 권 파니까 수익이 안 나잖아요. 돈 벌러 나가서 밥 사 먹고 담배 사 피우고 술 사 마시고 하면 남는 게 없어요. 두어 달인가 하다가 못 하겠다고 포기해버렸어요. 다시 노숙 생활을 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돈 벌 줄 알았는데 수익이 안 나니까.

집에 돌아와서 3일인가 5일인가 안 나갔는데, 《빅이슈》를 소개해준 조 총무가 (지금은 나가고 안 계시지만) 고시원에 찾아와서는 그러지 말고 나가래요. 돈이 한 푼도 없다고 하니까 1만 원을 가져와서 5천 원짜리 두 장을 만들어주는 거예요. 책이 5천 원 할 때니까 손님이 1만 원짜리를 내면 5천 원을 거슬러줘야 하잖아요. 그 돈이랑 교통카드 살 돈을 주더니, 빅이슈 코디네이터 분한테 전화해놨으니까 가서 일단 책 열 권 가져가라고, 돈은 나중에 책 팔아서 갚으래요. 그걸 들고 다시 을지로에 판매하러 나갔어요.

그렇게 사흘 정도 팔고 있으니까 담당 코디네이터에게서 전화가 오대요. 빨리 카트 접어가지고 종각역 5번 출구로 오라고 하는데, 그때만 해도 거기가 어딘지 몰랐어요. 바로 옆인데도. 내가 옆 가판대에서 담배 파는 아저씨랑 친하게 지냈어요. 물어봤더니 바로 요 위라고, 걸어가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책을 끌고 가니까 코디네이터님이 거기 계시는 거예요. 종각역은 광장이 굉장히 넓어요. 그 가운데서 책을 놓고 팔라고 하니까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창피하고 힘들더라고요.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데, 몸을 의지할 만한 기물도 없고 광장 한가운데서 잡지를 딱 놓고 팔라고 하니까. 지금이야 내 자리려니 하지만 그때만 해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책을 펴놓고 있으니까 그렇게 잘 팔릴 수가 없는 거예요. 책을 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였어요. 하루에 서른 권, 쉰 권씩 팔리는데, 뭐 이런데가 다 있나 싶었죠.



빅판의 기쁨과 슬픔

코로나19 오기 전에는 참 잘 팔렸어요, 그 자리가.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다들 재택근무하고 길거리에 사람이 없으니까 그 전의 3분의 1 정도밖에 판매가 안돼요. 나라 경제도 어렵고 사회도 어렵잖아요. 그러니까 돈을 안 쓰는 거예요. 원래 금요일이 제일 잘 팔리는 날이에요. 토요일, 일요일에 쉬잖아요. 주말에 집에 가서 맘 편히 읽어보려고 사 가는 거지. 아무리 못해도 금요일에 스무 권에서 서른 권은 팔아야 하는데, 지난주에는 여덟 권밖에 못 팔았어요. 어제는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책이 한 권도 안 팔리는 거예요. 퇴근 시간이라 사람들이 수도 없이 지나가는데, 책을 들고 서 있어도 사 가는 사람이 하나 없어요. 속으로 ‘나도 어렵지만 다들 어려워서 책을 안 사 가시는구나.’ 하고 생각해요.

그래도 저는 한 곳에서 오랫동안 판매하다 보니까 단골분들 덕분에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늘 사시는 분은 사 가시거든요. 원래 종각 근처 살다가 광화문 거쳐서 일산으로 이사 가신 분이 있어요. 그분이 광화문 사실 때 근처에 판매하는 분이 있으니 가까운 데서 사시라고 했더니, 그러면 안 된다면서 꼭 여기까지 와서 사가셨어요. 일산에 사는 지금도 한두 달에 한 번씩은 오시거든요. 며칠 전에도 왔다 가셨는데 참 고마운 분이지요.

단골 중에 교회에 다니는 분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은 똑같은 책을 네 권씩 사서 한 번에 스무 권 가까이 사가고 그랬어요. 돈도 은행에서 막 찾아온 깨끗한 지폐로 주셨지요. 부활절 같은 날에는 선물을 가져다주시기도 하고요. 그렇게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지금은 그분도 어려우신 것 같아요. 한두 달 정도 안 오셨어요. 아주 고마운 분인데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요. 어디 아프시거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오늘 못 팔면 내일 판다 이런 마음으로 나와요. 사람의 인내심이라는 게 한계가 있잖아요. 서너 시간 서 있는데 책이 한 권도 안 팔리면 엄청 스트레스받아요. 신도림역에서 빅판으로 일하는 동생이 종일 두 권 팔았느니 이런 얘기하면, 내가 책을 잘 판 날은 미안하잖아요. 그럼 동생 불러서 같이 막걸리도 한잔하고 그래요. 한 권 한 권 팔 때마다 감사한 마음 갖고, 항상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해요.

마음이 정말 좋지 않을 때는 무시당할 때예요. 어떤 빅판한테 지나가던 노인네가 10원짜리 몇 개를 주고 가

더래요. 저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 자존심이 무척 상해요. 사람을 거지로 본다는 거잖아요. 거지라도 10원짜리 주면 받습니까? 안 받는데. 한 번은 자전거를 타고 가던 사람이 서더니 100원짜리 동전 세 개를 주는데, 바닥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찌글찌글하더라니까요. 그 돈 300원을 나한테 주고 가대요. 나를 어떻게 보기에 이런 걸 주나 싶더라고요. 그 돈을 쓸 수 없잖아요. 종각역에 지금은 안 보이시는데, 구걸하던 할머니 한 분이 계셨어요. 나랑 얘기도 하고 알고 지내는 분인데, 그분한테 드렸어요. 할머니는 좋아하시죠, 돈이니까. 사무실에서는 늘 “선생님은 엄연히 책 파는 사장님이에요. 당당히 고개 들고 판매하세요.”라고 하시는데, 그런 일 겪으면 참 난감해요. 《빅이슈》 판매하는 사람을 아직도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사람으로 본다는 얘기잖아요.


지금은 한자리에서 오래 하다 보니까 그런 일이 없는데, 처음에 판매할 때는 거리 노숙을 하시는 분들도 그랬어요. 술 먹고 와서 저한테 소리 지르고 시비 걸고 돈 빌려달라고 하기도 했어요. 시간이 흐르면 그런 일이 없는데, 새로운 데 가면 늘 그런 문제에 부딪혀요. 《빅이슈》 판다고 우습게 보니까. 그런데 한자리에서 오래 판매하면 단골도 생기고, 주변에 아는 사람도 많이 늘어요.

저는 역무원들하고도 인사하고 지내요. 비가 오면 종각역 5번 출구 안으로 내려가거든요. 거기에 막힌 자리가 한 군데 있어요. 처음에는 지하도로 내려갔다가 역무원들하고 다투기도 많이 다퉜어요. 우리가 사무실에서 주는 공문을 갖고 있거든요. 추운 날이나 비 오는 날에는 일시적으로 역 안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하라고 교통공사 측에서 내려온 협조 공문이에요. 역무원들이 나가라고 하면 그걸 보여줘요. 그걸 보고도 나가라고 하면 이제 다투는 거지. 나가라고 한다고 나가면 책을 못 파니까 어떻게든 제가 말로 그 양반을 설득해야 돼요. 당신은 나보다 좋은 자리에 있잖아, 가진 게 있을 때 아닌 사람을 도와줘야 되는 거 아니야, 상부에서 공문이 떨어졌는데 당신이 왜 못 팔게 하는 거야 하고 따지니까 나중에는 얼굴이 벌게지더라고요. 사람도 많이 지나다니고 안 되겠다 싶으니까 가는 거지. 직원이 바뀌면 한 번씩 와서 뭐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 있는 직원들하고는 인사하고 지내요. 멀리서 봐도 내가 자꾸 알은체하고 인사하거든요. 그분들이 나중에는 와서 책을 사더라고요. 청소하는 아줌마들도 “아저씨, 많이 팔았어요?” 하고 인사하고 가시고. 서로 인사하고 편하게 지내는 게 좋지요.

원래는 제가 조금 내성적이었어요. 누구하고 얘기하는 걸 힘들어하고 먼저 말도 잘 안 걸고 그랬는데 《빅이슈》 판매하면서 사람이 달라졌어요. 얼굴이 두꺼워졌다고 해야 하나.(웃음) 누가 와도 금세 대화도 나누고, 잡지를 팔면서 자꾸 읽다 보니까 말주변이 조금씩 생기더라고요.



먹고사는 일의 고단함

고시원에서 5년 가까이 지냈어요. 주거지를 옮길 수 있는데 판매지 때문에 아직 고시원 생활을 해요. 사무실에서 소개해주려는 임대주택은 종각이랑 거리가 멀어요. 책은 점점 두꺼워지고, 신간이 나오면 제가 한 번에 책을 예순 권 넘게 살 때가 있어요. 과월호도 이것저것 종류가 많으니까 다 끌고 나오면 100권이 넘어요. 그걸 들고 지하철을 갈아타려면 무지하게 힘들어요. 저도 이제 나이가 60대 중반인데, 거리가 멀면 더 힘들어지니까 거처를 못 옮기는 거지. 지금은 을지로입구역 근처에 사니까 걸어서 20~30분이면 오거든요. 요즘에는 빨리 나오면 오전 10시에 나와요. 원래 하절기에는 오후 3시부터 8시까지 판매하는데, 지금 그렇게 해서는 밥벌이를 못 하죠. 10시 반쯤 도착해서 기도 올리고 판매 준비하면 점심시간에 식사하러 나오는 분들 있잖아요. 그분들 바라보는 거예요. 보통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에는 사람이 없고 판매도 전혀 안 되니까 그때 점심 먹고.

편의점에 가면 3900원짜리 달걀 든 도시락이 있어요. 아주머니한테 그거 하나 팔지 말고 놔두라고 부탁해요. 2시 반에 그거 들고 와서 화단에 앉아서 먹는 거예요. 옛날 같으면 부끄러워서 그렇게 못 할 텐데, 지금은 누가 쳐다봐도 속으로 ‘소풍 와서 밥 먹는다.’ 생각해요. 요새는 날이 워낙 더워서 밥보다 음료수나 우유로 때울 때가 많아요. 간혹 어지러울 때가 있어요. 더운 날씨에 밖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 그러더라고.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 것 같아요. 여유 있을 때 곰탕 같은 거 한 번씩 먹으면 속이 든든하고 괜찮은데. 하루에 두 끼 먹으면 잘 먹는 거예요. 원래 위장이 좋지 않아서 위장약을 달고 살았어요.

저녁에 집에 가면 배고프니까 밥 좀 먹고. 우리 고시원에서는 밥만 줘요. 밥을 금방 지었을 때는 먹을 만한데 저녁에 먹으려고 보면 밥이 누렇고 냄새가 나. 지금은 즉석밥 사다 먹어요. 주민센터에서 월요일하고 목요일에 반찬 세 가지씩 가져다줬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올 때도 있고 안 올 때도 있어요. 쉬는 날에는 시장 가서 김치랑 반찬을 사고, 과일도 사고. 저는 대구 사람이라서 과일을 좋아하거든요.


원래 대구 사과가 유명하잖아요. 우리 아버지 계실 때는 사과 농사도 짓고, 한동네에 작은집도 있고 외갓집도 있고 친척이 많았어요. 우리 집 광주리에는 복숭아, 자두, 포도 등등 아무튼 과일이 없는 게 없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물 한 컵 마시면 좋다고 하는데, 저는 눈뜨면 과일을 먹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냉장고에 넣어둔 시원한 과일을 먹으면 진짜 맛있어요. 농사지으면 조그마한 거 땅에 많이 떨어지거든요. 그걸 주워가지고 솥에 삶아서 잼 만들어 먹고 그랬어요.

제 아버지가 사업해서 실패를 많이 봤어요. 할아버지가 큰 부자였대요. 아버지가 셋째 아들인데 똑똑해서 재산을 제일 많이 물려받았어요. 근데 사업해서 망하고 남 보증 서서 다 날린 거예요. 지금 동대구역 자리 있잖아요, 그 땅이 원래 우리 아버지 땅이었어요. 사업하다가 힘드니까 팔아버렸는데, 10년인가 20년인가 지나고 나니까 거기에 역사가 들어섰다고 하더라고. 아버지가 조금만 잘해주셨더라면 우리가 공부도 많이 하고, 내가 여기까지 안 왔을지도 몰라요. 형도 공부를 잘했는데 학교를 못 가고, 누나는 검정고시 봤고, 내 바로 위에 형은 야간으로 대구상고 나와서 제일은행 다니다가 퇴직했어요.

제가 셋째 아들인데 가정 형편이 어려우니까 학교 가면 맨날 육성회비 안 낸다고 선생님한테 회초리로 맞고 그랬어요. 어린 나이에 하도 맞으니까 화가 나서 선생님한테 덤볐다가 ‘쓰레빠’로 심하게 맞은 적도 있는데 그게 싫어서 학교를 안 갔어요. 초등학교를 그만두고 처음에는 구두 만드는 데 들어갔다가 나중에 열일곱 살 때 자전거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서 7년간 다녔어요. 거기서부터 조금씩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거지요. 낮에는 거기서 일하고 저녁에는 부업거리 가져와서 일하고요. 그 공장이 밤낮으로 돌아가고, 바쁘면 3일 동안 잠도 안 자고 일할 때가 있었어요. 그때 사장님이 하신 말이 있어요. 훈재 같은 놈 둘만 있으면 다른 사람다 필요 없다고. 제가 일을 그 정도로 잘했어요. 몸도 건강했고요. 스물몇 살 젊을 때니까 하루 이틀 철야한다고 힘들 것도 없고 한 달에 두 번 쉬고 일해도 거뜬했지요. 제가 키는 작아도 약하지는 않아요. 동 대항 씨름 대회 나가서 100kg 넘는 사람도 다 넘길 정도로 힘이 좋았어요. 그런데 서울 와서 몸을 다 버린 거예요, 노숙하다가. 지금도 신도림에 있는 동생한테 말해요. 우리가 빅이슈를 안 만났으면 아직도 노숙 생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빅이슈는 살아갈 힘을 주는 곳”

빅판으로 일하면서 일단 생활 리듬이 달라졌지요. 자신감도 생겼고요. 돈은 많이 못 벌지만 당당하게 사회생활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잖아요. 그리고 말소됐던 주민등록도 살려서 은행 거래도 하고, 정부 지원도 받을 수 있고요.

《빅이슈》를 판 지 1년쯤 됐을 때 다른 데서 일하러 오라고 연락받은 적이 있는데, 거기도 안 갔어요. 전에도 몇 번이나 직장에 들어갔다가 적응을 못 해서 나왔잖아요. 이번에도 나오면 그나마 이 자리도 놓치는 거예요. 종각에서 5년 넘게 일하면서 독자분들이랑 쌓은 관계가 있는데, 다른 데 가면 다시 새로 시작해야 되거든요. 저는 책 파는 일이 적성에 맞아요. 독자 분하고 대화하는 것도 좋고, 단골 분하고는 편하게 얘기하고 지내거든요. 이제는 고시원에 있는 것보다 거리에 나와서 《빅이슈》 파는 게 더 마음 편해요. 책이야 잘 팔릴 때도 있고 안 팔릴 때도 있지만, 결국 언젠가는 팔린다는 걸 알아요. 가끔 힘들 때 사무국에 찾아가서 그만두겠다고 말한 적도 몇 번 있는데, 그럴 때마다 판매팀의 이선미 국장이 많이 다독거려줬어요. 지금도 가려고 하면 갈 데는 있지만, 저는 여기가 편해요. 일도 그렇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렇고요.

앞으로요? 저는 크게 바라는 거 없어요. 돈 욕심도 별로 없고, 그저 《빅이슈》 꾸준히 판매하면서 건강하게 살고 싶어요. 빅판으로 지내는 데 만족합니다. 빅이슈는 내 삶에 많은 도움을 준 곳이에요. 살아갈 힘이 되지요.


김훈재 님은 기술자로 일하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관리자와 트러블이 잦았던 자신을 두고 ‘예민하고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절반의 진실일 것이다. 내가 본 김훈재 님은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다. 그래서 ‘강약약강’이 어려운 건지도 모른다. 상대가 사장이든, 역장이든 할 말은 하고 본다. 대통령 할애비가 온다 해도 필요하면 쓴소리를 할 사람이다. 조곤조곤한 기세랄까. 누가 와도 꺾을 수 없는, 내적 강인함이 느껴진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강한 사람한테 굽히지 않고, 약한 사람한테 하나를 더 내주는 사람.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잘 지내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종각역 5번 출구 김훈재 빅판의 단골들이 코로나19를 이겨내고 무사히 돌아와주기를, 그래서 그가 좋아하는 과일을 철마다 실컷 사 먹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글. 김은화|사진. 김근정


*이 글은 '빅이슈' 259호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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