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역 이근철 빅판
이근철 빅이슈 판매원(이하 빅판)은 손에 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근철 빅판의 왼손에서 온전한 손가락은 엄지 손가락 하나뿐이다. 그를 처음 만난 사람은 손등 아래로 손가락이 없는 그를 보고 당황하기도 한다. 손가락이 없으니 잡지를 판매하는 일 역시 수월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근철 빅판은 불편한 손으로 책을 판매대에 진열하고, 비닐 포장을 하고, 독자에게 성심껏 잡지를 건넨다. 세상은 어떤 사람에게 유독 지독하게 굴기도 한다. 누구나 제 삶이 고되었다 말하지만 이근철 빅판의 삶은 힘들거나 고독했다, 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퍽퍽했던 그의 삶에도 윤기가 돌기를 바라며 그의 이야기를 전한다.
오늘 한파에 함박눈까지 펑펑 내렸어요. 이런 날은 판매하기 힘드시죠?
눈도 많이 오면 아무래도 힘들죠. 독자들이 이런 날은 장갑 벗어야지, 지갑 꺼내야지 귀찮으시죠. 그래도 비 오는 날보다는 눈 오는 날이 나아요. 비 오면 안 사도 눈 오면 사세요. 비 오면 우산 들고 다니잖아요. 빗물 뚝뚝 떨어지는 우산 접어 지갑을 꺼내고 잡지도 손에 들어야 하니 잘 안 사시지요.
앞으로 한파가 계속 이어질 테니 판매지에서 온종일 서 계시기가 더 힘드시겠어요.
빅판들이 다 고생하는 거죠. 저야 뭐 추위를 좀 덜 타니까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은 고생이 많죠. 지금도 저 파카 안에 반소매 티셔츠만 입었어요. 땀이 많이 나서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한겨울에도 반소매 옷만 입고 막 돌아다녔어요. 그러다 아버지한테 혼도 많이 났어요. 얼어 죽으려고 그러느냐고요.(웃음)
손은 어쩌다 다치셨어요?
왼손 손가락이 엄지 빼고 다 잘리고 없어요. 자동차 부품 회사 다닐 때 유압 프레스에 손이 들어간 건데, 좌절감에 몇 번 죽으려고도 했지요. 이런 손으로 살아 뭐하나 싶었어요. 그때 진짜 죽으려고 그랬어요. 한강에 몇 번을 갔었다니까요. 그때부터 매일 술을 마시기 시작했죠. 손 다 잘리고 나니 딱 살기 싫더라고요. 손 다치고 전라도에 가서 노가다(막일꾼)로 12년 동안 했어요. 그때 좀 살아갈 용기가 생겼다고 할까. 손가락이 없어도 내가 일만 열심히 하면 먹고산다 하고 마음을 다잡았죠.
어린 시절은 어떠셨어요?
어릴 때 아버지한테 엄청 두드려 맞았어요. 거의 매일 맞았어요. 요즘 뉴스에 나오는 거 보면 그게 아동 학대였지요. 무지막지하게 맞아도 누가 말려주지도 않고. 책 살 돈, 공책 살 돈 한 푼 주지 않고 매일 때리기만 했어요. 담임선생님이나 교장 선생님이 불쌍하다고 공책 같은 것 챙겨 주시고 그랬어요. 제가 매일 막 말썽을 일으켜서 때린 건 아니고요. 제 남동생이 매일 징징거리고 그러니까 어린 동생은 못 때리고 나만 계속 두드려 팬 것도 있고… 암튼 어릴 때 아버지한테 무지 많이 맞았어요.
집에서 버티기 힘드셨겠어요.
열일곱 살 때 단돈 5천 원 가지고 집을 나와 서울에 올라왔어요. 취직하려니까 나이가 어리다고 안 써주는 거예요. 서울에 와서 일주일을 물만 먹으며 길에서 잤어요. 어느 날은 봉제 공장 밑에서 잤는데, 거기 사장님이 보시고 “야, 꼬마야 너 밥은 먹었니?” 묻더니 같이 밥 먹자고 하시대요. 밥 먹고 나니까 자기 공장에서 같이 일하자고 하시더라고요. 밥 먹여주고 재워주며 한 달에 10만 원 주신다고요. 그길로 제 사회생활이 시작된 거지요. 그 후로 한 10년 동안 집에 안 내려갔어요. 10년이나 지나서 집에 갔는데도, 집에 들어가는데 혼날까 봐 무섭더라고요. 저한테 집은 그런 곳이었어요.
그럼 첫 직장이 봉제 공장이었네요?
거기서 같이 일하는 누나들이 “어린데 공부해야지 학교를 안 다니면 어떻게 하니.” 하면서 학교에 보내주셨어요. 그래서 야간 중학교를 다녔지요. 공장 일 끝나면 학교 가고, 밤 10시에 학교가 끝났거든요. 집에 오면 또 숙제하고 공부하고 그러다 잤어요. 어린 시절이 아주 힘들고 피곤했지요.
봉제 공장에서는 무슨 일을 하셨어요?
아이롱(아이론) 했어요. 옷 다리는 거 있잖아요? 또 단추도 달고 그랬지요. 단추 달아주는 기계가 있어요. 단춧구멍이랑 단추랑 맞춰서 놓고 발로 밟으면 기계가 알아서 단추를 딱딱 달아줘요. 바지 밑단에 오버로크 치는 것도 해봤고요. 재단 빼고는 다 했어요. 재단은 배우려고 했는데 제가 머리가 나빠서 잘 안 되더라고요.(웃음) 봉제 공장을 나온 뒤에는 지갑 만드는 공장에서도 일했어요. 그러다 자동차 부품 회사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장애를 입은 거고요. 장애가 생기니 인생이 내리막길이더라고요. 열일곱 살에 서울 올라온 뒤 고생을 무지하게 했어요. 아주 고단한 인생이었네요.
오늘처럼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은 판매지 나가기 더 힘드시죠?
네, 그렇죠. 아침에 일어나서 유난히 판매하러 나가기 싫은 날이 있어요. ‘아 오늘은 또 몇 권이나 팔리려나, 잘 팔리지도 않는데 가기 싫다.’ 싶어요. 그래도 남들 출근하는 모습 보면 나도 일하러 가야겠다 하고 털고 일어나 나오지요. ‘남들 다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나도 굶어 죽을 수는 없다.’ 하고 또 일하러 갈 준비를 해요. 이런 날은 ‘추운데 고생 많으세요.’ 이런 말씀 건네주시는 독자들이 계세요. 그럴 때가 제일 좋죠. 전 사주셔서 감사하다고 항상 인사드려요. 독자들께 《빅이슈》 좀 많이 사랑해달라고 말씀드리고요.(웃음)
어떤 분들이 주로 사 가시나요? 판매지가 광화문이니 역 특성상 회사원이 많겠어요.
광화문 근처에는 은행, 보험회사, 투자증권 이런 회사가 많지요. 근데 그런 데 다니는 분들은 잡지를 안 사세요. 어쩌다 광화문에 나온 분들이 사 가시는 경우가 많아요. 예전에는 대학 근처 판매지에서 잘 팔렸어요. 학생들이 많이 사줘서요. 처음 빅판을 할 때 숭실대입구역에서 팔았는데, 하루에 40권, 50권도 팔았어요. 그때는 잘 팔렸어요. 또 예전에 숙대입구역에서 팔 때는 한 목사님이 햄버거랑 감자튀김, 음료수도 사다 주시곤 하셨어요. 그분은 꼭 세 권씩 사 가셨어요. 무척 감사했지요.
감사할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빅판님께 큰 힘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럼요. 되고말고요. 세상을 저 혼자 살 수는 없잖아요. 그런 분들이 계셔서 저도 있고요.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려고 해요. 세상에 울분을 가진 적도 많았지만, 이제 그런 마음은 다 가시고 없어요.(웃음)
글. 안덕희/ 사진. 김화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