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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밭골샌님 Mar 27. 2024

골목길 야생화 14 백목련

나무에 피는 연꽃, 고고한 선비의 자태


백목련


흙탕물에 자라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꽃이 있습니다.

연꽃이죠. 청정과 무구함의 상징으로 불교의 꽃이자, 세속에 물들지 않는 고고한 기상으로 군자의 꽃이기도 합니다.


그게 나무에 피었다면?

목련(木蓮)이죠. 고아하고 정갈한 이미지와 맥없이 지고 마는 허무함으로 많은 시인들의 사랑을 받는.


잎은 아직 피지 않았습니다

유백색 꽃봉오리로 현신했습니다

봄날의 순결은 이런 것입니다."

- 김명수, <목련 개화>에서



분류학상으로 목련은 우리나라 토종 목련을 가리켜요. 제주가 원산이라,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흰 목련 꽃의 99%는 중국이 원산인 백목련이랍니다.

목련은 꽃잎이 완전히 펴지지만, 백목련은 꽃잎이 제쳐질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목련과의 토종으론 함박꽃나무도 있습니다.

산목련이라고도 부르는데요. 꽃이 땅을 향해 피죠. 현재 북한의 국화이기도 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꽃은 백목련.

큰 키지만 늘어진 나뭇가지 덕분에 꽃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기에 서둘러 보여드립니다.

곧 만나게 될 친구들의 속내를 알아두면 좋을 듯해서요.


목련과의 낙엽교목.

교목(喬木)이란 키가 큰 나무를 말해요. 높이는 15m쯤.

영춘화(迎春花), 목필(木筆), 백목란(白木蘭), 신이(辛夷)라고도 부릅니다.

영춘, 참 많이 쓰이죠? 그만큼 일찍 핀다는 뜻입니다.


북쪽을 향해 있어 북향화, 붓 끝을 닮아 목필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남쪽에서 꽃눈을 보호했던 껍질이 먼저 벗겨졌다.


목필은 꽃봉오리가 붓끝을 닮은 데서 붙여진 이름.

백목란은 고고한 기상이 난초 같아서, 신이는 꽃봉오리 상태의 성분이 매운맛이 나서 붙여졌답니다.

영어명은 Magnolia.


보라색 꽃 피우는 자목련(紫木蓮)은 백목련보다 열흘 이상 늦게 펴요. 그래서 망춘화(亡春花)라고 한대요.


어린 가지와 겨울눈에 털이 많아요.

털외투를 입은 모습으로 곧잘 비유될 정도.

줄기는 곧게 서고 가지를 많이 냅니다.

잎은 거꾸로 세워놓은 달걀모양이거나 긴 타원형.

길이 10~15cm.

가장자리는 밋밋하고 잎자루가 있어요.


3~4월에 잎보다 먼저 꽃이 흰색으로 핍니다.

향기가 강한데요.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이 향기를 극도로 두려워해서 목련 그늘 아래서는 낮잠도 자지 않는다고 해요.


꽃 지름은 12~15cm.

3개의 꽃받침조각과 6개의 꽃잎 모양이 서로 비슷해 꽃잎이 9장인 것처럼 보입니다.

암술은 윗부분에 돌출되어 있어요.

그 아래로 여러 개의 수술이 나선 모양으로 붙어 있죠.


꽃의 내부. 가운데 솟아난 부분이 암술, 주변의 노란색 수술들이 암술을 둘러싸고 있다. 암술이 가루받이를 마쳐야 수술의 꽃가루가 나온다.


사진에 보면 중앙에서 솟아나 갈라진 게 암술. 그 밑으로 수술이 감싸고 있어요.

암술이 먼저 발달해 수정을 한 뒤에야 수술에서 꽃가루가 나온대요. 자가수분 즉 근친교배 회피전략인 겁니다.


열매는 골돌과로서 원기둥 모양.

8~9월에 갈색으로 익고 길이는 8~12cm.

종자나 접붙이기로 번식한대요.


종류로는 자목련, 자주목련, 산목련(함박꽃나무), 별목련, 일본목련이 있어요.

한방에서는 꽃봉오리를 말려 두통이나 비염 약으로 쓴대요.

꽃말은 ‘연모’,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목련 열매. 사진= 나무삼촌님 블로그

저기 햇살이 달려옵니다

양지쪽으로만 고개를 돌리는 꽃과 달리

봄이 와도 찬바람 불어오는 쪽을 향해

의연히 서 있는 목련처럼

꽃눈 내밀 때의 첫 마음으로 돌아가ᆢ

- 도종환, <십 년> 중에서


시인의 노래처럼 목련꽃은 해를 향하지 않아요.

북쪽을 바라보기에 북향화(北向花)라고도 하는데요. 꽃봉오리 절반 이상이 북쪽을 향합니다.

예로부터 북쪽은 임금의 자리를 뜻해요. 북극성이 별 중의 왕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왕위에 올라 통치하는  ‘남면(南面)한다’고 하죠. 반대로 북면(北面)은 임금을 섬기는 신하(臣下)라는 뜻입니다.


북쪽을 향하는 현상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이렇습니다.

목련은 가을부터 꽃눈을 만들어 겨울을 나요.

남쪽이 북쪽보다 햇빛을 더 받으니, 더 빨리 생장해 부풀겠죠? 북쪽은 상대적으로 더디게 자라니 북쪽으로 꼬부라질 밖에요.


영어에선 잎이 남북 방향으로 나는 식물들을 나침반 식물(Compass Plant)이라 하는데요.

목련의 꽃봉오리나 꽃도 그런 점에서, 방향 잃은 여행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군요.


식물 진화의 역사에서 목련은 매우 중요합니다.

백악기인 1억 4천만 년 전쯤의 목련 화석이 발견되었는데요. 이 때는 벌이나 나비가 출현하기 이전이랍니다.

꽃을 피우는 식물의 기원을 목련으로 추정하기도 한다네요. 수분은 딱정벌레류가 맡았을 것으로 추측한답니다.


시인 박목월은 ‘목련꽃 그늘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했고요.

가수 양희은은 ‘아픈 가슴 빈자리에 하얀 목련이 핀다’고 노래했어요.


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뿐이랴

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

어디 목련뿐이랴

- 박용주, <목련이 진들> 중에서


김훈은 <자전거 여행>에서, 목련에 대해서도 예의 그 묵직한 시선을 던집니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추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목련과에 속하는 함박꽃나무. 산목련이라고도 한다.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사실 목련꽃이 진다고 해서 봄이 다 간 것은 아닙니다. 뒤이어 벚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초봄에 피는 꽃은 노란색이 많아요. 산수유, 영춘화 풍년화, 히어리, 생강나무, 개나리, 만리화.

진달래와 목련처럼 분홍과 흰색은 소수지요.


이들은 잎보다 꽃이 먼저입니다.

목련을 빼고는 키가 작은 관목이죠. 키가 큰 나무들이 깨어나 그늘을 드리우기 전에 후다닥 피어 씨앗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야생화들은 관목보다 더 서두를 수밖에 없어요.


목련 꽃이 지고 나면, 흰색 계열의 꽃이 대세를 이룹니다.

벚나무에 이어 이팝나무, 고추나무, 국수나무, 조팝나무, 때죽나무, 괴불나무.

꽃이 먼저 나기도 하고 잎이 먼저, 혹은 동시에 나오기도 해요.


식물은 온도도 중요하지만, 낮의 길이를 감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해요.

춘분이 지나면서부터 해가 길어지죠?

요 며칠 꽃을 시샘하는 추위와 비로 꽃들이 주춤하지만, 낮이 길어지는 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므로 추위에도 꽃을 피웁니다.


지구 온도가 불안정해진 요즘, 그나마 잘 견딜 수 있는 건 식물이랍니다. 가장 어려움을 겪는 건 인간이고요. 인간은 일정한 온도 범위 안에서만 살 수 있도록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래요.


수억 년을 지나도록 살아남은 식물들은 기온의 급상승이나 급강하를 견뎌왔습니다. 이는 온도보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대한 감지력에 비중을 두고 진화해 왔기 때문이랍니다.

나무는 '지베렐린'이라는 식물 호르몬으로 낮이 길어지는 걸 감지해 생장을 촉진한대요. 반대로 낮이 짧아지는 건 앱시스산 호르몬으로 감지해 성장을 멈춘다네요.


어떤 분야든 알면 알수록 더 신비스럽고 더 어려워지는 거겠죠?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식물들을 관찰하고 연구한 끝에 이런 결론에 이른 수많은  식물학자들이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2024년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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