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술에 배부르랴'... 하지만

예술가의 아내는 기억력이 나빠야 한다.

by 지망생 성실장


뮤지션 이그나이트의 아내 7년 차. 어느 순간 내 직업이 예술가의 아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이 배우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예술가의 배우자라는 자리는 종갓집 며느리처럼 뭔가의 기대치와 의무감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아직 결혼 7년 차 밖에 안됐고, 아직도 무명이고, 딱히 내조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예술가를 배우자로 둔 사람으로서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한 번 써내 보려고 한다.

‘예술가의 아내’ 시리즈의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예술가와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 그런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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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 ‘공항 가는 길’이라는 KBS 드라마가 방송되었다.


애들이 자는 방에 텔레비전이 있는 관계로, 드라마 등 방송을 거의 못 보는 내가 ‘공항 가는 길’의 첫 방송을 기다린 이유는 바로 남편의 노래가 드라마에 나온다는 점 때문이었다.


드라마 O.S.T 에 남편이 참여한다는 사실에 나는 엄청 들떠있었다.


공중파 드라마 O.S.T 아닌가. 얼마 전 방영한 ‘태양의 후예’만 봐도, 드라마 한 편 보지 못한 나조차도 드라마 O.S.T는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의 파급력이 큰 시장이니까 말이다.


우리 남편 노래는 좋으니까. 적당한 타이밍에 한 번만 노래가 흘러나오면 엄청 주목을 받을 것 같았다.


‘공항 가는 길’ 첫 방송이 끝나면, 바로 인터넷에 “엔딩에 나온 노래 뭐예요?" 라던지, "음악 정보 좀 알려주세요" 하는 질문이 줄줄이 달릴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점점 커져서, 노래만 한 번 나오면, 바로 여러 기획사에서 곡 의뢰가 물 밀 듯이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허황된 망상으로 자라났다.


남편도 은근 기분이 좋았는지, 시댁과 친정에 자랑스럽게 드라마 보시라고, 노래 나온다고 말을 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항 가는 길' 첫 방송, 정말로 그 중요한 엔딩에 남편의 노래가 나왔다.


불과 1분 정도에 불과한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음악과 영상이 모두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방송이 나간 다음 날, 여기저기 남편 노래가 공중파에 나왔다며 자랑을 했다.


그동안 앨범 발매한다고 백번을 말해봤자 신경도 안 쓰던 사람들이, 이제야 ‘음악을 하고 있긴 했구나’ 하는 표정으로 축하한다고 말을 해주는데, 기분이 참 좋았다.


그 기세 그대로, 2화에도 기대하며 드라마를 열심히 본방사수했다. 그런데 2화에는 안 나왔다. ㅠㅠ


드라마 작업을 처음 해보는 거라 우리가 잘 몰랐던 것인데, 드라마는 촌각을 다투며 마치 생방송처럼 제작된다고 한다. 아무것도 미리 결정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즉, 노래가 한 번 나왔다고 계속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또 안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남편의 다른 노래가 실릴 수도 있고, 한마디로 방송이 나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암튼 결론은 2화에는 안 나왔다. 3화를 다시 기대해봐야겠지.


결국, 무지한 내가 혼자 샴페인을 먼저 터뜨린 것이다.


그냥 정말 흘러가는 노래였을 뿐인데...... 1분 흘러나온 노래로는 아무것도 크게 바뀌는 것이 없을 텐데. 내가 왜 이리 들떠서 떠들어 댔을 까.


아이고 부끄러워라.

sticker sticker



예술가의 아내는 기억력이 나빠야 한다.




남편을 만난 지 8년, 사실 이렇게 샴페인을 먼저 터뜨려 부끄러웠던 적이 처음은 아니다.


잘 될 것 같았던 시도가 실패도 했고, 눈앞에서 기회를 놓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많이 속상하고, 한동안 위축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제 우리가 실망했었는지, 좌절했었는지 말이다.


그저 계속 도전했고,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자꾸 기회가 오는 것 같다'라는 것만 생각할 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만약, 그때는 이래서 힘들었지, 그때도 그렇게 실망했었지, 그러고 보니 인생에 기회가 3번 온다는데 이미 지나갔나. 우리는 이 길이 아닌가. 등등으로 생각이 뻗어나간다면, 남편이 음악을 하는데 도움을 주기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는 예술가의 부인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


어제의 실망을 금세 잊어버리고, 오늘은 어떤 곡을 작업하냐고 물어보는 나니까.



어제의 실망을 금세 잊어버리고,
오늘은 어떤 곡을 작업하냐고 물어봐 줄 수 있는 아내.



한 번은, ‘첫 술에 배부르랴’라고 하는데 우린 이미 열 술은 먹은 것 같은데. 언제 배부르려나, 언제 성공하려나...라고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열 술에 배가 안 부른다면, 100 술이건, 100 그릇이건 배부를 때까지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이거 완전 시간제한 없는 뷔페인데? 괜찮네. 천천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구먼, 누가 음악 하지 말라고 쫓아내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고민 하지 말자’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기억력만 나쁜 게 아니라, 자기 합리화도 저는 진짜 예술가의 아내구나.

내 남편, 진짜 결혼 잘했구나. 정말 내 남편은 나한테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하하하.


이런 내가 불쌍하게 보이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예술가의 아내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니 혹시 지금 만나는 사람이 예술 관련 일을 하고 있다면, 냉정하게 돌아보기 바란다. 도망갈 수 있을 때 도망가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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