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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망생 성실장 Nov 30. 2023

23년 11월 30일 첫 번째 진료

정신과가 처음은 아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해서 중간중간 이비인후과 내과 다니듯이 잘 다녔었다. 

하지만, 내가 사실 예술가병에 걸려서, 우울증도 멋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실제로 대부분의 진료에 약을 처방 안 해주거나, 안 먹어도 크게 뭐라고 안 했었다. 

우울증, 불안증, 알코올의존증 등을 나는 의심했지만, 실제 의사들은 그냥 "문학소녀의 우울증 즐기기"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나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고. 


그러다 내가 크게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것은.

큰애 백일즈음, 울면서 애를 재우다가, 아파트 14층에서 뛰어내라고 싶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갓난애를 안고, 남편이랑 정신과를 갔는데.

산후우울증 진단을 받았고, 진료를 계속 받고 싶었지만 받지를 못했다.

1. 돈이 없었고

2. 애 엄마가 우울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3. 차도 없고, 애를 봐줄 사람도 없어서, 진료받을 때마다 남편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남편은 내 정신건강에 큰 관심이 없었다 ( 아니면, 본인도 두려워서 모른 척했거나 ) 


그 후에도 몇 번 시도를 했으나.

나는 어른이고, 애 엄마였기에, 치료를 받을 시간을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나는 정말 단 1분도 남편의 도움을 받지 않고 24개월을 버텼다. 


암튼 그렇게 14년이 흘렀고, 큰아이의 2번의 심리 검사 결과, 아이가 다 정상이고 다 똑똑한데, 엄마 때문에 불안증이 높다. 엄마의 우울과 불안이 높아서 엄마가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는 결과를 받았다. 

신촌 세브란스에 진료를 의뢰하니 24년 7월 이후에나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여러 검사들이 아마 수십만 원이 나올 것 같아 두렵기도 했지만, 내년 7월까지 기다리는 것이 맞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다.


그래도 요즘에는 일이 좀 느슨해져서 욕을 잘 안 하니까 참아보려고 했었다.

대학병원에 가야 믿음이 생길 것 같아서, 그동안 고만고만한 병원을 다니면서, 돈과 시간만 버린 것 같아서 굳이 작은 병원은 가지 말고, 큰 대학병원에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런데..

또 며칠 전, 애들에게 욕을 했다. 사실 그동안 "썅년" 까지는 했는데 이번에는 "씨발년들아 내가 좆같냐"까지 해버렸고, 나 스스로가 용납이 잘 안 됐다. 


그래서 고민 끝에 회사 근처 정신과에 다녀왔다. 


원장님이 "진료받으면 좋아질 것 같냐"라고 질문을 하셨고,

사실 나는 기대가 안된다. 약을 먹는다고 해결될 것 같지 않다. 근본적으로 나를 외롭게 하고, 일꾼으로만 보는 남편이 문제이고, 능력이 없는 내가 문제인데, 약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라고 했다.


원장님은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지금 당장 급한, 욱하는 마음, 심한 감정기복을 달래줄 수 있다. 한 번에 확! 해결은 안돼도, 점진적으로 분명 기분을 환기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일상생활이 좋아질 것이다.

약을 먹으면서, 진료를 오래 받으면, 분명 지금보다는 여러 면에서 나은 일상을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어쨌든 나는 바란다. 

 더 이상 내 두 딸들에게 쌍욕을 하고 싶지 않고, 때리고 싶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버럭 하고 싶지 않고, 친구가 없어 외롭고 싶지도 않고,

"애들에게 소리치지 않고, 협박하지 않고, 때리지 않고, 욕하지 않고, 남들처럼 안건이 없는 대화를 수다를 편하게 나누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은 진심이다. 


그래서, 약을 먹기로 했다. 


아침약을 바로 먹었다. 


약을 먹은 지 2시간이 지났다. 딱히 지금은... 잘 모르겠다. 당연하게도. 


잘 모르겠다.

개원한 지 얼마 안 된 나보다 젊은 의사 선생님을 믿고 싶다. 


우리 딸이 불쌍하다.

내가 불쌍하다. 

미안하다. 


오늘로써 심리검사를 한 10번째는 한 것 같다. 역시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 환자로 나오겠지 싶은데. 

이번이 마지막이면 좋겠다.


그래서 이번에는 열심히 약도 먹고, 오란데로 꼬박꼬박 병원도 잘 가려고 한다. 

이젠 애들도 학교를 가니까. 

이젠 직원도 생겼으니까. 

남편 눈치 도움 없어도 병원 갈 수 있으니까. 

1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애들한테 욕만 안 하고, 폭력만 안 쓸 수 있다면, 남편과 이혼을 하던지 사랑을 하던지 결판을 낼 수 있다면 

뭔들 못하겠는가. 


이게 긍정적인 결과로 나타나서, 돈이나 많이 모아서, 혼자 살 수 있는 발판이 되면 좋겠다. 


다음 진료는 4일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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