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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기후위기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나

Written by 중혁

“환경에도 관심이 있으신가 봐요?”


해가 뜨거워서 따가웠던 2018년 7월 17일은 제헌절이자 초복이었다. 보신탕 반대 행사 취재를 갔다가 만난 동물권 단체 관계자 A가 물었다. 그때만 해도 A가 비건인지 몰랐고, 동물권 단체의 많은 분들이 기후 변화에도 관심이 많은 경향이 있다는 것도 잘 몰랐다.


“아니요? 왜요?”


아차… 내뱉고 보니 ‘사실 동물권도 별 관심 없고, 당장 오늘 기삿거리가 급해서 온 건데 갑자기 웬 환경이죠?’ 하는 뉘앙스가 듬뿍 담긴 목소리와 표정으로 단박에 말한 것 같다. 상대도 좀 이상했는지 “아 그러시구나… 이메일 주소가 green이길래”라고 답했다. 듣고 보니 질문이 납득이 됐고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아 그냥 제가 초록색을 좋아해서요”라고 간단히 답했다.


물론 ‘아 실은 제가 말이죠. 어렸을 때부터 집중력이 엄청 안 좋았거든요. 초등학교 3~4학년 때쯤 학원 통지표에 선생님이 ‘애가 산만하다’고 쓴 적이 있는데, 저는 그때 산만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거든요? 근데 엄마가 화들짝 놀라면서 걱정을 하더라고요. 그래도 성적은 나쁘지 않아서 나름 뭐 잘 놀고 공부도 좀 하는 멋있는 거 아닐까 자뻑했는데, 나이를 먹다 보니 그게 아니더라구요. 중·고등학교 가니 잔머리로 성적 올리는 건 한계가 있고 집중력은 계속 없으니까 답답할 노릇이었는데 그래도 어찌어찌 졸업하고 대학을 가긴 했어요. 그러다 하루는 TV를 보는데 초록색이 집중력 향상에 좋다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초록색을 집착하듯 좋아하게 된 거예요’

라고 좀 더 자세히 설명할 수도 있었겠지만, 신께서 집중력을 덜 준 대신 눈치는 좀 주신 덕에 초면인 사람을 붙잡고 이런 말 하는 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취재를 마쳤고, 현장에서 만난 심석희 선수와 함께 사진을 찍는 영광도 누리고 무사히 하루를 넘겼다. 헌데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에 남은 건 A의 물음이었다. 가볍게 들었던 말은 잊을 만하면 문득문득 떠오르곤 했다. ‘사실상 회사에서의 이름이 green인 건데 앞으로는 환경에도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걸까’ 부채감이 조금, ‘혹시 환경단체들 취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딱히 안 된다)’ 하는 기대감은 잔뜩. 하지만 그것도 행동으로 옮기진 못한 탓에 환경 공부를 한다거나 관련 기사를 쓰지는 못했다지.


그러는 사이 지구는 꾸준히 더워지고 있었다. 그해 여름 서울의 밤은 유독 더웠다. 기상관측 111년 만에 첫 초열대야라는 게 들이닥쳤다. 전날 저녁 오후 6시 1분부터 당일 오전 9시까지 최저기온이 30도 이상인 현상이란다. 밤중에도 계속 30도가 넘을 정도로 덥다는 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열대야도 26일 연속 지속돼 역대 최장이던 1994년 기록(24일 연속)을 깼다.


2019년 6월 말에는 국제부로 가게 됐다. 외신과 국제기사를 보면 climate change, 기후변화 따위의 단어들이 종종 보였다. 국내 주요 언론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단어들이었다. 어쩌면 있었는데 내가 외면했을 단어들이기도 했다.

국제부에서 본 세상은 이랬다. 멸종저항(XR)은 2019년 10월 영국 런던, 미국 뉴욕,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호주 시드니 등 세계 주요 도시에서 도로 점거 시위에 나서 경찰에 연행됐다. 미국은 파리기후협약에서 공식 탈퇴했다. 전 세계 과학자 1만 1000명은 “기후위기로 치명적 재앙이 닥칠 것”이라 경고했다. 이탈리아 교육부 장관은 청소년들의 등교거부를 독려하고 ‘기후변화 의무교육’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영국 법원은 XR의 시위·집회를 금지한 경찰의 처분이 불법이라 판결했다. 의학전문지 랜싯은 기후변화가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의 건강에 더 악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했다. 영국 옥스퍼드사전은 2019년 올해의 단어로 ‘기후 비상’(Climate Emergency)을 선정했다. 세계경제포럼은 2020년 50주년을 맞아 ‘기후변화’를 핵심 의제로 다뤘다. 이곳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기후변화를 걱정하는 환경운동가들을 ‘거짓 예언자’로 치부했다. 그레타 툰베리는 트럼프를 비롯한 세계 정상들을 향해  “당신들의 빈말로 내 어린 시절과 내 꿈이 사라졌다”고 일갈했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쓰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기후변화의 세계에 들어와 버렸다. 산만한 사람이었고, 집중력 부족 콤플렉스가 있었고, 어쩌다 TV에서 초록색이 집중력에 좋다는 걸 보게 됐고, 초록색을 좋아하게 됐고, 회사 이메일로 green을 써버렸고, 누군가는 거기에서 ‘환경’을 기대했고, 나는 ‘기삿거리’라는 흑심을 품었고, 형식이 내용을 좌우할 때가 있듯 ‘green’으로서의 나는 ‘환경’에 관심을 품게 됐다. 여전히 기후변화가 정말 오는 건지 의아해하면서도 스스로를 설득해나가려 분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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