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이 달리기 magazine]은
평안한 달리기를 추구하며 ‘달리기와 일상’에 대한 주제로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젊은 나이긴 하지만 확실히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해가는 게 하나 있다. 먼저 예전보다 채소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한식뷔페나 교내식당을 가면 제육볶음이나 닭도리탕, 돈가스 같은 메인음식들로 식판을 가득 채웠다. 반대로 김치나 나물은 한 조각으로 최소한의 맛만볼 수 있게 퍼다 먹었다. 그런데 작년부터는 부쩍 야채나 나물을 찾기 시작한다. 식판에 고기음식은 되도록 적당량 받고, 예전에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던 가지나물이나, 시금치류를 적당히 담아서 먹는다. 예전에는 이런 야채나 채소에서 나오는 풍미를 잘 느끼지 못했는데, 요즘에는 그 맛 자체가 즐겁기도 하고, 채소를 먹으면 건강도 좋아지는 느낌이라서 오히려 더 선호하기 시작했다.
올해 들어서 하나 더 바뀌기 시작한 것이 있는데 바로 제철음식을 챙겨 먹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는 겨울에 먹는 사과나 봄에 먹는 사과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맛의 차이야 좀 있다고 쳐도 1:1로 비교해 놓고 먹는 것이 아닌 이상 분간해 내기도 어렵기도 하고 영양학적으로는 다 비슷할 텐데, 어른들은 제철음식에 유난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계절이라는 게 매년 돌아오는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요즘은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법하다.
직장인으로 회사와 집을 오가는 단순화된 삶에 재미랄 것이 별로 없다. 하루하루가 그저 반복되는 느낌이다. 요즘은 오늘 뭐 했지? 하면 딱히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다. 최근 몇 년을 반추해 보았을 때 명확하게 무엇을 이룬 것도 없는 것 같고 손에 남아있는 게 없다 보니 허송세월 몇 년을 허비한 느낌이다. 때로는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인생을 잘 살아왔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왜 이렇게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가?
어렸을 때는 시간이 지겹도록 안 가는데 성인이 될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이유. 그건 삶이 너무 단조롭기 때문이라고 한다. 뇌라는 하드디스크가 저장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비슷한 카테고리는 새로운 저장용량을 쓰지 않고 기존에 저장된 기억을 끄집어내서 쓰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계절마다 즐길만한 소소한 이벤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그저 흘러만 가는 시간대에 기억할만한 깃발을 하나씩 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하나가 제철음식을 챙겨 먹는 것이었다. 아마 내가 어렸을 때의 어른들도 일상에서 작은 이벤트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꼭 영양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 계절과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그 순간을 조금이라도 즐기려고 제철과일이나 야채로 그 시간을 조금이나마 즐기며 붙잡아두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겨울을 가장 좋아한다. 겨울은 소소한 추억거리를 만들 수 있는 거리가 꽤 많기 때문이다. 연말과 연초에 그간 미뤄왔던 안부를 주고받거나, 크리스마스라를 통해 가족, 연인 간 이벤트를 할 수 도 있고, 새해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설렘으로 가득한 달이기 때문이다. 꼭 이런 행사적인 면을 제하고서도 겨울에 먹는 어묵이나 붕어빵, 호빵, 귤 같은 미식(?)도 꽤나 큰 즐거움의 요소이다.
그래서인지 연말 연초에는 시간이 조금은 더디게 가는 것 같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시작하는 계절에 나에 대해 되돌아볼 시간도 가지면서 기억할 거리를 늘리면 그저 흘러만 갔던 인생을 나의 의지로 조금 가둬두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때로는 뿌듯한 마음까지 든다.
하지만 이런 겨울이 좋은 기억만으로 가득한 건 이다. 달리기에 가장 힘든 계절은 역시 겨울이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체감온도 영하 10도 이하의 기온에 밖에서 뛰러 나간다고 하면 지인들이 깜짝 놀란다. 실제로 겨울철에 밖에서 뛰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아웃도어 운동에 있어서 추위와 맞서 싸울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없기도 하고. 단순히 인내한다고 해도 실질적인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겨울의 야외활동은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없다. 이 말에 확언할 수 있는 이유는 십여 년 전 군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10월에 입대를 하여 12월 즈음에 첫 근무를 나가게 되었다. 보통 군대에서 겨울 보급품이라고 해봤자 솜으로 두툼하게 채워진 장갑이나 아우터가 전부인데, 이런 방한용품이 군대의 강추위에 큰 도움이 될 리가 만무하다. 내가 보급받은 겨울용 장갑은 유난히 얇았다. 나중에 알았던 사실인데 소위 말해 A급(상급) 보급품은 주로 상병장들이 나눠갖고, 일병 이등병들은 솜이 다 빠진 폐급 방한용품을 지급하는 형식이었다.
군인은 근무 중에 *입수보행을 할 수 없다. 6시간 정도를 그렇게 얇은 장갑에 의지하며 근무를 해야만 했다. 문제는 근무를 돌아와서 생겼다. *탄을 빼려고 하니 손가락이 굳어서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당직사관은 탄을 빼지 못하는 내 모습을 답답하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해명이라도 하지 않으면 크게 혼나겠다 싶어서 큰 소리로 “손가락이 안 움직입니다!”하고 양해를 구했던 기억이 있다. 이 과정에서 탄창을 제거하다가 탄알을 하나 떨어트렸는데, 평소 같으면 크게 혼날 거리였겠지만 (아마도?) 손이 완전히 얼어버린 내가 안쓰러웠는지 별 꾸지람 없이 넘어갔다. 나는 이때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다음 해 내가 사수가 되어 근무를 나갈 때면 부사수들에게도 입수보행을 해도 된다고 충분히 설명(아니 사정)을했던 기억이 있다. 겨울이 힘드냐, 여름이 힘드냐 이런 주제는 사회에서는 50대 50으로 선호도가 갈리는 문제이겠지만, 아웃도어 활동을 한다는 전제 하에는 혹한기가 혹서기 대비 위협적이 요소가 더 많다
군복무에 비하면 애교겠지만 겨울러닝도 나름 힘든 면들이 있다. 예상했겠지만 역시 침대를 벗어나는 것부터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일단 러닝을 하려면 러닝복장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난방시스템은 온돌이기 때문에 공기를 직접적으로 데우는 구조는 아니다. 그렇다 보니 집안의 바닥이 가장 따뜻하고 천장으로 갈수록 공기가 차가워질 수밖에 없다. 내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해보자면 요즘에는 가스비를 좀 아껴보겠다고 보일러는 동파가 방지될 정도로만 틀어놓고, 대부분의 생활은 전기요 위에서만 보낸다. 나의 투철한 자린고비 정신으로 인해 우리 집 실내온도는 꽤나 추운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옷을 갈아입는 것 자체가 공포일 때가 있다.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까지는 비교적 쉽다. 그런데 방안 실내온도가 낮다 보니 입고 있는 옷을 갈아입을 엄두가 나지를 않는 것이다. 한국의 자랑거리 K-온돌 시스템이 등을 지지는 데 있어서는 최고의 선택지 었으나, 집안에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좋은 난방 시스템은 아니란 점을 이때 처음 느꼈다.
겨울에 있어서 복장은 매우 중요하다. 함부로 옷을 걸치고 나갔다가 옷을 벗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낭패다. 너무 두껍게 입으면 옷이 젖어 추워지고, 너무 얇게 입으면 그대로 몸이 얼어버린다. 전자나 후자나 고통스러운 달리기를 한다는 것은 공통점이겠다.
러너로서 겨울을 몇 해 겪어보지 않으면 겨울철 달리기 복장은 미지의 영역에 가깝다. 같은 영하 10도라고 하더라도 그날의 햇빛이나 풍속에 따라서 체감온도는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맞은 복장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러너는 얇은 옷을 여러 겹 입는 방법을 택한다. 내가 예상한 체감온도보다 더운 경우에 얇은 겉옷 벗어 손에 쥐고 달리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젖어버린 옷을 말리기에도 좋은 선택지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보통 몸에 열이 오르기 전에는 모든 착장을 하고 달리면서 바람막이 한 겹정도를 입었다 벗었다 반복하는 식으로 달린다.
이러한 복장을 절대로 우습게 보면 안 되는 게. 만약 한강 변두리에서 혼자 달리다가 저체온증에라도 빠지게 되면 생명에 위협을 느낄만한 사고가 날 수도 있다. 겨울철에는 가능한 얇고 많은 옷은 끼어 입어야 한다는 말을 주저리 떠들어 놓았는데, 결국은 침대를 벗어나 옷을 환복 하는 절차가 그만큼이나 쉽지 않다. 아직 현관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겨울 달리기에 쓰이는 에너지는 50%는 마음먹는데 30%는 환복 하는데, 나머지 20% 정도인 느낌이다.
여차저차해서 옷을 갈아입었다고 해도 현관이 남았다. 밖에 나가서 준비운동을 해야 하는데 몸에 열이 쉽게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몸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달리기 시작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겨울 달리기는 봄 열리는 메이저 대회에서 제대로 달리기 위한 빌드업시즌인 경우가 많은데, 겨울철에 부상을 당해버리면 차라리 운동을 안 하느니만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추위를 이기고 몸에 열이 날 때까지 준비운동을 해야만 한다. 아마 가장 추운 체감온도를 느끼는 단계야 몸 푸는 단계이지 않을까 싶다.
몸이 풀리고 나서도 해가 없거나 강풍이 부는 날에는 열은 쉽게 나지 않으며 근육은 쉽게 움츠러든다. 이때 몸을 데우려고 조금이라도 빠르게 달리면 나도 모르는 새에 등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다. 이때는 이미 늦는다. 이미 몸에 땀이 과도하게 나버린 상황이라면 몸이 식는 속도보다 몸에 열이 나는 속도를 높이기 위해 계속해서 질주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언발에 계속해서 오줌을 눌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게 되는 것.
한마디로 겨울철 달리기는 까다롭고 귀찮은 요소가 한둘이 아니다. 이 내용 말고도 글에 적지 못하는 겨울 달리기 준비가 꽤나 많다. 겨울에는 이마가 얼어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플 수 있으니 모자를 잘 써야 한다느니, 추울 때는 유독 콧물이 많이 난다느니… 그렇게 인내하여 달리기를 시작한다고 해도 까다로움의 연속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겨울철 달리기를 싫어하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개인마다 각 계절에 대한 호불호는 있더라도 각 계절마다 선호하는 제철음식이 하나즈음은 있는 것처럼 겨울에도 겨울에만 할 수 있는 달리기가 있다.
먼저 겨울에 대한 경험치가 쌓이면서 착장에 대한 기준이 생기고, 땀이 적당히 날정도의 페이스를 찾기만 한다면 그만큼 열을 효율적으로 식혀줄 수 있는 계절이 겨울이다.
대회에 참가하는 러너들은 LSD훈련이라고 해서 먼 거리를 천천히 달리는 훈련을 필수적으로 한다. 그런데 훈련량이 엄청 많은 러너가 아니라면 LSD 훈련을 끼워넣기 애매한 경우가 있다. 봄, 가을에는 비교적 힘껏 달리기 좋은 날씨인데, 힘껏 달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다소 따분할 수 있는 LSD 달리기로 시간을 보낸다는 게 막상 겪어보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봄가을에는 강도 높은 달리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여름에는 LSD를 하게 되면 수분배출로 인한 문제나 열을 배출하지 못해서 생기는 여러 문제가 예상될 수 있다. 여름철게 길게 달리는 행위는 어지간한 경력자가 아니고서야 몸을 해치는 행위에 가깝다. 그래서 보통 짧고 굵게 할 수 있는 훈련들을 하는 게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겨울은 이런 LSD훈련을 하기에 최적화된 계절인 것이다. 천천히 달리면서 근육에 열도 나고 바깥바람이 몸을 식혀준다. 적당한 속도로 달리면 땀이 나도 바로 마르는 쾌적 환 환경을 제공한다. 겨울이라는 계절은 정말 장거리를 천천히 달리기에 최적화된 계절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수박을 여름에만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LSD도 꼭 겨울에만 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역시 어느 때 가장 제맛을 느낄 수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겨울철에는 천천히 길게 하는 달리기가 제일 좋은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겨울에 하는 달리기가 가장 정신이 맑다. 우리가 보통 잠을 깨기 위해서는 환기를 하고, 추운 겨울에도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 정신이 번쩍 든다. 사실 달리기 만으로 어느 정도 신체, 정신적인 각성효과를 볼 수 있기도 한데, 겨울철에는 이러한 각성효과가 배가 되는 것 같다. 정신이 한번 각성되면 그동안 복잡하게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이 정리가 되고, 주변의 풍경이 환기되며 덜 복잡해 보이고 명료해 보인다.
겨울철에는 고요한 달리기가 가능하다. 겨울에는 야외에 사람이 많이 없기도 하고 해가 일찍 지기 때문에 거리에 사람이 적다. 겨울 자체는 매우 추운 계절이지만, 이러한 고요함 속에서 달리기를 하면 어딘가 모르게 포근한 느낌이 든다. 자세하게 비유하기는 어렵지만, 추운 겨울에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면 생기는 그런 푸근한 감정이 느껴진다랄까.
마지막으로 겨울철 달리기의 묘미는 역시 크리스마스 분위기이다. 사계절 중 겨울은 사람들이 여러 도구를 활용하여 거리를 디자인하는 계절이다. 봄부터 가을은 주변의 자연 풍경을 보는 달리기(그것만으로도 꽤나 만족스럽지만)를 주로 한다면, 겨울철에는 도시에 장식된 수많은 불빛들 그리고 그것들이 이루는 야경을 보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이런 점에서 러너로서의 겨울은 단순히 춥고 버텨야만 하는 계절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각 계절마다 선호하는 제철과일, 해산물 따위가 있듯이 겨울에만 즐길 수 있는 달리기를 완성해 나간다면 자연이 주는 혹독함을 조금 더 쉽게 극복할 수... 아니 오히려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달리기를 통해 더 추억할 거리도 많아질 것이고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나의 의지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입수보행 : 손을 주머니에 넣고 걷는 행위
*탄 : 탄창, 총알을 모아둔 뭉텅이
*당직사관 : 야간에 근무하는 실무 대장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