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입니다. 혹시라도 제 소식이 궁금하신 분이 있으셨을까요? 한 분이라도 계셨다면 매우 감사하고 황송할 따름입니다. 저는 현재 '별일 없이 달리기'라는 이름으로 달리기에 대한 에세이를 발행하고 있어 왔는데요. 최근에는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별일 없이 달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는 별일도 없었고 달리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글감 자체가 없었던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겨울철 달리기는 너무나도 혹독합니다. 사실 어쩌면 이건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한주 두 주 쉬어가다 보니 달리기를 하지 않는 것이 어쩌다 보니 일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실 11월부터 잔병치례를 많이 했습니다. 어느 날 달리기를 하는데 평소보다 속도도 안 나고 심박도 치솟더군요. 제가 아무리 느린 축에 속하는 러너라지만 그날은 정말 이상하리만큼 몸이 무거웠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기력의 저하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말이죠. 스마트워치는 정말 대단하더군요. 바로 다음날 고열과 장염에 시달려 몇 주간 고생했습니다. 이렇게 한번 쉬고 나니 다시 달릴 의지가 많이 사라져 있더라고요. 겨울은 너무 춥잖아요!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마음으로, 무리하게 달려서 다칠 바에 확실히 쉬어서 컨디션을 회복하자!라고 마음먹으니 어느덧 봄이 되어버렸습니다..
봄날씨가 다가오니 이렇게 좋은 날씨에 달리지 못한다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가 삶을 낭비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올해는 NB와 대구마라톤 하프마라톤에 신청했습니다. 사실 한 두 달 달리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10k를 해야 바람직한데, 다시 내려가는 게 더 어렵더라고요. 나는 Half를 달려냈으니 어떻게든 Half를 달려야겠다는 마음만 들었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하프 마라톤까지는 별다른 훈련을 하지 못했어요. 체력이 안되면 기술의 힘을 빌려보고자 작년에 사고 한 번도 제대로 신어보지 못한 카본화를 꺼내 들었습니다. 저는 이 카본화를 신고 신나게 달리다가 아킬레스건염으로 달리기를 1년 쉬었더랬죠? 그래서 사실 좀 긴장도 되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즐겨보던 '나루토'라는 애니메이션에는 체술의 달인 '가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데요. 이 캐릭터는 궁극의 체술을 터득한 닌자로 일종의 필사인기인 팔문둔갑이라는 필살기가 있습니다. 이 필살기를 쓸 때만큼은 나루토라는 애니메이션 최강자가 됩니다. 주인공 보다도 더 강해지는 것이죠. 하지만 이 필살기의 단점은 지속시간이 엄연히 정해져 있고, 무엇보다 끝내 술자의 생명을 앗아간다는 치명적인 리스크가 있습니다. 말이 좀 길었죠? 저에게는 카본화가 이런 '팔문둔갑'과도 같은 존재로 느껴졌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곧 하프마라톤은 매주 연달아서 있지, 하지만 작년에 비해 준비는 오히려 더 되지 않았지. 카본화를 함부로 신었다가 달리기를 1년 쉬어보기도 했지.... 하지만 이래서 DNF를 하나 저래서 DNF를 하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뉴발란스 하프마라톤에 카본화를 신고 참가했습니다.
어떻게 됐냐고요? 기록은 2시간 15분!, 작년 경주 마라톤에는 2시간 28분인가가 기록이었는데 무려 13분이나 기록을 당길 수 있었답니다. 기술의 힘이라는 게 참 복잡 미묘한 마음을 들게 하더라고요. 기록이 줄어 기분이 좋으면서도, '이게 진짜 내 실력이 맞나?' '나는 이번 시즌에 훈련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하면서 경기에서 반칙이라도 한 죄인이 된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기분은 아주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어찌 됐든 작년부터 단련된 근육이 있었기 때문에(일종의 머슬메모리) 하프를 성공적으로 완주할 수 있었다고 믿기로 했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하프를 뛴 이후에 건염이나 인대에 무리가 없었던 것을 보면 작년보다는 괜찮은 레이스를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별일 없는 달리기였냐? 면 그에 걸맞은 레이스는 아니었습니다. 경주마라톤에서의 레이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페이스가 일정하면서, 내가 가진 에너지를 균등하게 분배한 레이스였다면. 이번 뉴발란스 하프마라톤은 기술도핑을 하고서도 막마지 15k부터는 걷고 뛰기를 반복해 억지로 완료한 레이스이거든요. 몸은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완주에 대한 욕심까지 생겨버리니 결국 몸을 혹사시키는 레이스가 되기는 하였습니다. 사실문제는 근육이 아닌 소화기관에 생긴듯했는데요. 몸을 혹사시키고 먹은 소화가 되지 않은 중식 때문에 그날 저녁부터 장염과 열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다음 주 주말이 대구마라톤이었는데 말이죠. 다행히도 이런 장염몸살기는 2~3일이 지나니까 호전이 되었습니다.
이때는 몰랐죠 제가 얼마나 무지하고 거만했는지... 이 이야기를 이어가려면 대구마라톤이야기를 해야만 합니다. 하프마라톤을 뛰고 일주일 근육도 100% 회복이 되지 않았는데, 대회전날 대구방문기념으로 막창골목에 가 폭식을 했습니다. 시킨 음식을 다 먹지도 못할 만큼 주문을 해버렸습니다. 대회를 위한 대구가 아닌 먹기 위한 대구가 된 것이죠. 그렇게 숙소에 돌아오니 저녁 9시 즈음이 되었습니다. 다음날이 바로 대회였으니 늦잠을 잘 수 없어 소화도 시키지 못하고 잠에 들었습니다.
숙소가 어색해서였을까요? 그날 밤은 깊은 잠에 들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니 손발이 차갑고 몸에서 열이 느껴지고 기운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급체를 한 겁니다. 대회 당일날 급체라니요. 저의 잘못이 너무 명확해서 화도 나지 않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더라고요. '뛸 수 있는 만큼만 뛰자'라는 생각으로 대회장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그렇게 대회장에 8시 30분 정도에 도착했습니다. 출발 리허설도 하고, 수많은 인파 때문인지 셔틀도 운영을 하지 않더라고요. 대회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이미 행사장은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리허설을 하는데 출발 폭죽까지 터트리는 것 아니겠어요? 이때 뭔가 이상하구나 느꼈습니다. 대회 개요를 보니 출발시간이 9시가 아닌 8시였습니다. 바보같이 그 누구도 출발시간이 9시라고 한 적이 없었는데 9시에 출발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부랴부랴 짐을 맡기고 남들보다 30분 정도 늦은 시간에 대회장을 출발했습니다. 게다가 물품보관소에서 출발선까지 1km 정도는 되어서 하프+1km를 달려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죠.
다행히 몇 킬로 달려보니까 몸에 피가 돌아서 인지 장염 기는 많이 가라앉는 것 같더라고요. DNF 하더라도 최소 10km 정도는 달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보급이었는데요. 애당초 저는 2:30 half러너인데도 불구하고 출발시간까지 30분 늦어버렸으니 제대로 물보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체력관리가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후미에서 출발을 하다 보니 저 같은 지각생 몇 명을 제외하고는 주자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대회 참여해 보신 분들이라면 하시겠지만 소위 '대회뽕'이라고 해서 수많은 인파와 함께 달려야 본인의 실력보다 더 빠르게 달릴 수가 있는데요. 지각생들은 나 홀로 달리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평소실력 이상으로 달릴 수도 없습니다. 정말 시간과 정신의 밤에 갇히게 돼버리는 것이죠.
아까 제가 하프+1km를 달려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스마트워치 측정도 실제 주로보다 1km를 앞서서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5km마다 물이 준비가 되는데요. 제 시계는 5km를 가리키고 있는데도 물이 나오지 않는 거 아니겠어요?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는 1km를 더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죠. 레이스 초반에는 이 점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레이스 후반부에는 나는 15km를 이미 달렸는데 남은 거리는 6km가 아닌 7km가 되니까 계산이 복잡해지고 인내심이 바닥이 나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17km부터는 거의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의 오전을 정리를 해보자면..
- 이미 전 주에 하프마라톤을 뛰어서 몸살감기에 걸림
- 근육도 완벽히 회복되지 않았는데 대회 전날 과식하고 장염에 걸려 컨디션이 바닥을 침
- 당일 지각하고 수분공급도 제대로 하지 못함
그러면 fun run을 위해 17km 정도에서 DNF를 하고 레이스를 종료했어야 바람직했는데요. 사람 마음이... 참 그렇지 않잖아요? 고작 4km 정도만 더 달리면 되는데! 불명예스럽게(실제로 명예랑은 아무런 상관은 없지만) 레이스를 포기하는 제 모습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영락없이 초보 러너인 게 티가 나는 부분입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렇게 꾸역꾸역 레이스를 어찌어찌 마쳤습니다. 정말 꾸역꾸역 걷고 달리고 걸었습니다.
이번 대구마라톤 하프는 풀코스를 중간까지만 뛰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대회장으로 돌아오는 루트였는데, 어떤 할머님이 어찌나 저를 처량하게 보셨는지 자리를 비켜주실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저는 대회전 중후 모드 최악의 컨디션으로 대회를 임했던 것이죠.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자랑스럽지만은 않네요. 나는 과연 별일 없고 평 않나 달리기를 하였는가? 한다면 전혀 그렇지 못한 달리기였거든요. 달리기 실력은 달리기 전으로 초기화되지 않았는데 오히려 마인드가 초기화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제가 그동안 글을 남기지 못했던 이유, 최근의 마라톤과 겪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았습니다.
정리된 글이 아닐 텐데요. 이렇게라도 오랜만에 글을 남겨 한 두 명에게라도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글이라도 된다면 그게 낫겠다 하여 글을 씁니다. 저의 올해 하프마라톤은 오뉴월에도 있습니다. 저 치열한 달리기가 될 것 같습니다.
무탈하게 달리려면 부단히 노력해 가야겠죠. 별일 없이 달리기 24년 시즌입니다.
cf. 대구마라톤 이후에도 몸살, 장염으로 며칠간 고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