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신체 예산에 대하여
삶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는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에너지를 소모하며 하루를 살아냅니다. 마치 통장에 돈이 들어오고 나가듯, 우리 안에는 한정된 ‘예산’이 존재합니다. 이 보이지 않는 예산의 중요성을 뼛속 깊이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열심히 살면 되지’ 하는 막연한 믿음으로 무작정 달려왔지만, 이 예산이 고갈되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했습니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는 사랑하는 이에게, 아이들에게 내가 가진 최선을 줄 수 없었습니다. 나의, 그리고 우리 가족의 ‘신체 예산(Body Budget)’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체 예산, 그 보이지 않는 통장
신체 예산은 신경과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Lisa Feldman Barrett) 박사가 저서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How Emotions Are Made)』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뇌가 신체 내부의 자원을 관리하는 방식을 은유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녀는 뇌를 유능한 ‘금융 관리자’에 비유합니다. 뇌는 끊임없이 몸의 에너지와 자원, 즉 혈당, 수분, 소금 등의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이것이 곧 우리의 감정과 행동의 근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예산은 충분한 수면, 영양가 있는 음식, 적절한 운동, 그리고 따뜻한 사회적 지지와 같은 ‘수입’을 통해 채워집니다. 반면 극심한 스트레스, 질병, 과도한 노동, 그리고 소모적인 감정 싸움은 막대한 ‘지출’을 불러옵니다.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여 적자가 누적되면 우리 몸은 피로감, 무기력, 짜증, 우울감 등 다양한 방식으로 경고 신호를 보냅니다. 이 상태가 해소되지 않고 지속되는 상태가 바로 번아웃이나 만성적인 무기력의 과학적 실체입니다.
일상의 다양한 갈등과 어려움들은 단순히 ‘문제’가 아니라, 신체 예산의 적자 상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에피소드 1: 어느 부부의 갈등 - 마른 수건을 쥐어짜는 대화
퇴근 후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온 남편과 재택근무 후 아이를 돌보느라 녹초가 된 아내. 둘의 에너지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잠든 후, 아내가,
“오늘 저녁은 뭘 먹지?”
라고 묻자, 남편은 평소 같지 않게 예민한 목소리로,
“알아서 좀 해주면 안 돼?”
라고 답합니다. 아내 역시 남편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고, 결국 대화는 깊은 싸움으로 번집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이다 깨닫습니다. 싸움의 원인은 저녁 메뉴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신체 예산이 바닥난 상태에서, 서로의 바닥난 통장을 보지 못한 채 남은 에너지까지 긁어모아 싸우고 있었던 것이죠. 이 짧은 다툼은 서로의 감정 계좌를 깎아내리는 것은 물론, 다음 날까지도 서로에게 싸늘한 공기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에피소드 2: 아이와의 다툼 - 인내심이라는 잔고의 고갈
아이와의 관계에서도 예산 부족은 안타까운 장면을 연출합니다. 네 살배기 아이가 밥을 먹다 국물을 쏟는 일은 발달 과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실수입니다. 하지만 부모의 신체 예산이 고갈된 상태라면, 이 작은 실수는 부모의 인내심이라는 잔고를 바닥내기에 충분한 도화선이 됩니다.
부모는 평소보다 훨씬 큰 목소리로 아이를 꾸짖고, 겁에 질린 아이는 울음을 터뜨립니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다시 부모의 편도체를 자극하여 더 큰 예산 지출을 불러일으킵니다. 지출이 지출을 낳는 악순환입니다. 이처럼 신체 예산의 고갈은 개인의 인격이나 사랑의 부족 문제가 아니라, 뇌가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할 능력을 상실했을 때 발생하는 ‘생물학적 위기’입니다.
회복을 위한 맞춤형 접근: 가족의 신체 예산을 살피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신체 예산이 어떤 상태인지, 무엇이 예산을 깎아내리고 무엇이 다시 채우는지 의식적으로 살피고 회복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신체 예산의 개념을 알고 나니, 서로를 비난하는 대신 ‘지금 상대방의 마음의 통장에 잔고가 얼마나 남았을까?’, ‘무엇을 하면 다시 채워질까?’를 생각하며 얘기를 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저 “잘있니?”라” 묻는 것을 넘어, 서로의 신체 예산 밸런스를 확인하고 회복에 도움을 주기 위한 구체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가족 구성원 간 신체 예산의 수준은 모두 다릅니다. 사고와 아픔을 겪은 후 남편과 아내의 예산 상태는 다를 것이고, 아직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자녀의 예산 상태는 또 다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편은 이래야 해’, ‘아내는 저래야 해’라는 고정관념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체 예산을 세심하게 살피는 맞춤형 접근(customizing approach)이었습니다.
이호선 교수님을 ‘이혼숙려캠프’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처음 알게 되었고, 그 명쾌한 정론과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을 접하고 팬이 되었습니다. 교수님의 한 강연에서 본 통찰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위기를 겪는 남편과 아내도 각자 ‘나름’의 노력을 합니다. 부부가 각자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만, 왜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지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나의 ‘수입’이 상대에게는 ‘지출’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친 아내를 돕겠다며 남편이 설거지를 하지만 정작 아내는 남편이 낸 그릇 부딪히는 소리에 예산이 더 깎여 나갈 수 있습니다. 혹은 아내가 남편을 위로하려 끊임없이 말을 걸지만, 고립을 통해 예산을 채우는 남편에게는 그 대화 자체가 감정적 지출이 되기도 합니다.
그 ‘나름의 노력’이 과연 상대 입장을 생각한 노력인지 고민해 볼 부분입니다. 역으로 상대의 노력이 나에게 효과가 적을지언정, 그 노력을 인정해주고 있는가 또한 고민해 볼 부분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 방식대로의 노력이 아니라, 상대방의 신체 예산 상태를 토대로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당신에게 도움이 돼, 아니면 오히려 더 힘들게 해?”라고 솔직하게 묻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서로의 노력이 진정으로 상대방의 신체 예산을 채우는 ‘수입’이 될 수 있도록 방향을 정밀하게 조정해나가야 합니다. 이미 관계 개선을 포기한 상태라면 어쩔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름의 노력’을 기울일 정도의 마음가짐이라면, ‘이렇게까지 해야할까요?’라는 물음에‘네. 이렇게까지 해야합니다.’라고 답하겠습니다. 평소가 아니라 어긋난걸 조정하려면 추가적인 고민이 필요합니다. 다만, 신체 예산이 어느정도 회복되면 노력의 정도는 줄어들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진화의 관점에서 본 신체 예산의 회복
이러한 갈등들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뇌가 진화해 온 방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장기적인 생존과 번식을 위해 신체 예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도록 진화해왔습니다. 이는 순간의 쾌락이 아닌, 공동체와의 연결을 통해 예산을 회복하는 방식을 선호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리학자 브래드 부시먼(Brad Bushman) 등의 연구에 따르면,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이나 중독적인 SNS는 일시적인 도파민 분비를 통해 쾌감을 주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뇌의 보상 시스템에 과부하를 주어 무기력과 불안감을 높일 수 있습니다. 즉, 순간적인 쾌락에 기반한 활동은 신체 예산을 채우는 '진정한 수입'이’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일확천금을 꿈꾸며 도박에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잠시의 짜릿함은 있을지 몰라도, 결국 통장 잔고는 더 빠르게 고갈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뇌는 신체 예산을 어떻게 회복하도록 설계되었을까요? 바로 사회적 유대와 가족 구성원과의 관계를 통해서입니다. 인류의 조상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공동체 생활을 선택했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상처를 치유해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뇌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유대감을 통해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하도록 진화했지요. 옥시토신은 '사랑 호르몬'이’ 불리며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를 낮추고 안정감과 신뢰를 높여줍니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의 카렌 그리웬(Karen Grewen) 박사 연구팀은 배우자와의 따뜻한 신체 접촉이 실제로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를 낮추고 옥시토신 수치를 높여 심혈관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밝혀낸 바 있습니다. 이는 고통과 외상을 치유하기 위해 가족관계를 공고히하는 방향으로 우리 뇌가 진화해왔다는 사실을 뒷받침하지요. 이렇듯 가족과의 따뜻한 접촉은 코르티솔 수치를 낮추고 신체 예산을 채우는 가장 강력한 진화론적 해결책입니다.
신체 예산 회복의 두 가지 기둥
신체 예산의 회복에는 두 가지 중요한 기둥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정의 신체예산의 회복’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대화의 기술’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앞서 언급한 옥시토신의 힘을 빌려, 서로 안아주고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예산을 공동으로 관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유대감은 심혈관 건강까지 지켜주는 가장 확실한 저축입니다. 이를 위해, 특히 아이와의 대화, 그리고 부부간의 대화에 대해, 공부하고 깨닫고 실천하는 바를 나누고자 합니다.
두 번째는 ‘개인의 신체 예산 회복’입니다. 웹툰 『미생』의 한 회상 장면, 바둑 사범은 장그래에게 “평생 해야 할 업무라고 생각하고 꾸준한 체력을 먼저 길러라”라” 조언합니다. “게으름, 나태, 짜증, 우울, 분노. 모두 체력이 버티지 못해, 정신이 육체의 지배를 받아 나타나는 증상이야. 네가 후반에 종종 무너지는 이유는, 데미지를 입은 후 회복이 더딘 이유, 실수가 더 잦아지는 이유, 모두 체력의 한계 때문이다.” 이 말은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체력이 되어야 개인의 신체 예산도 회복되고, 나아가 가족 구성원들의 신체 예산을 살펴볼 여력과 정신적 여유가 생깁니다. 이와 함께, 신체 예산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휴식과 독서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가족 외 나를 지지하고 내가 지지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얘기하려고 합니다.
신체 예산이 확보되어야 비로소 행복의 출발선에 설 수 있다
신체 예산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가족 구성원 각자의 예산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결국 가정 전체의 단단함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이 보이지 않는 예산을 함께 관리하고 채워나가며, 고통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힘을 얻고 있습니다. 가정 내 신체 예산과 개인의 신체 예산의 회복에 대해, 차차 얘기하기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