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야 할 이유를 찾아서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그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행복과 웃음에 관한 날카로운 비유를 들려줍니다. 누군가를 웃게 하고 싶다면 그에게 웃으라고 명령할 것이 아니라, 웃을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죠. 웃음을 강요해서는 결코 진정한 웃음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이제 네 살이 된 우리 집 첫째 연우를 보며 그 말의 의미를 실감합니다. 몰래 사진을 찍을 때 연우는 꽃망울이 터지듯 자연스럽고 해맑은 함박웃음을 짓습니다. 하지만 카메라를 보며 웃어보라고 하면, 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브이’를 그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표정을 짓곤 합니다.
인간은 단순히 행복을 맹목적으로 쫓는 존재가 아닙니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삶의 의미를 실현하며 ‘행복해야 할 이유’를 찾아가는 존재입니다. 그 과정을 통과할 때 행복은 비로소 선물처럼 저절로 찾아옵니다. “행복하고 싶다”는 막연한 선언만으로는 행복이 실현되지 않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행복을 느끼는가”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고, 그 이유를 일상에서 길어 올리는 지속적인 고민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상치 못한 구덩이 앞에서
인생이라는 이름의 길은 종종 우리 앞에 예상치 못한 구덩이를 파놓습니다. 그 구덩이가 얼마나 깊고 어두울지는 직접 발을 내디뎌보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얼마 전 개그맨 김재우 씨 부부의 기사를 우연히 접했습니다.
“오늘은 아내와 산책을 하다 벤치에 앉아 울고 있는 젊은 부부를 봤어요. 흐느껴 우는 아내를 바라보며 아무 말 하지 못하고 함께 울고 있는 남편… 스치듯 들리는 몇 마디였지만 예전에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소중한 아기를 잃은 엄마아빠 였습니다… 슬퍼하는 부부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차마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어요.. 그래서 이렇게라도 그분들에게 작은 응원의 글을 적어봅니다. 분명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 지금은 마음이 다할 때까지 슬퍼해도 된다고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나면 훌훌털고 일어나서 아이 몫까지 열심히 살아가면 된다고 꼭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들이 자신들과 닮은 아픔을 겪는 젊은 부부를 마주하고 외면할 수 없었다는 대목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습니다.
2018년 말, 태어난 지 고작 2주 된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그들의 고통. 아기가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몸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고백은, 그들의 슬픔이 얼마나 깊고 긴 시간 동안 영혼을 갉아먹었을지 짐작하게 했습니다. “마음껏 슬퍼하고, 시간이 지나면 아이 몫까지 열심히 살아가라”는 그의 담담한 조언은 같은 어둠을 통과해 본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깊은 공명이었습니다. 기사를 읽는 내내 나는 연서가 태어났을 때의 절망감을 복기했습니다. 병원 복도에 주저앉아 밤새 흘렸던 눈물, 아이의 작은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의료기기들… 그 먹먹한 시간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살아났습니다.
연서가 이 세상에 발을 디뎠을 때, 그 연약한 삶을 둘러싼 불안은 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했습니다. 명문대 졸업과 대기업 입사, 컨설팅 회사 이직과 창업까지.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이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라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연서의 시련 앞에서 그 견고했던 믿음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습니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것은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 절박하게 질문했습니다. ‘이 아픔 속에 나를 가두지 않고, 다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한 길이자, 동시에 연서와 연우, 그리고 아내를 위해 내가 반드시 찾아내야만 하는 답이었습니다.
고통의 심연에서 건져 올린 의미
중환자실에서 위태롭게 깜빡이던 의료기기의 불빛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절망의 심연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살 확률이 절반 이하’라는 의사의 말은 묵직한 망치처럼 내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친 것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빅터 프랭클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특히 불의의 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10대 소년 제리 롱(Jerry Long)의 이야기는 내게 거대한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머리뿐인 가혹한 현실 앞에서도 제리 롱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연하며 타인에게 희망을 전하는 삶의 의미를 기어코 찾아냈습니다.
“인간이 삶에서 기대해야 할 것은 행복한 삶이 아니라, 고통을 마주하고도 여전히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용기 있는 삶이다. 만약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이 문장은 내 가슴에 칼날처럼 박혔습니다. 연서의 작고 연약한 몸을 보며, 나는 우리에게 닥친 이 고통이 결코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 시련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가장 신성한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복탄력성을 위한 긍정적 전환
절망은 젖은 솜이불처럼 우리의 숨통을 조여왔지만, 그 속에만 잠겨 있을 수 없었습니다. 감정을 돌볼 줄 몰랐던 과거의 나는 고통을 그저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연서의 아픔은 나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나는 이제 연서의 작은 숨결 하나, 미세한 손가락의 움직임 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긍정심리학자 소냐 류보머스키(Sonja Lyubomirsky) 교수는 행복의 요인 중 40%가 ‘우리의 통제 가능한 의식적인 활동’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유전이나 환경은 바꿀 수 없지만, 이 40%의 영역—긍정적 재규정, 감사, 친절—은 우리의 노력으로 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40%의 가능성에 매달렸습니다.
먼저 ‘긍정적 재규정(Positive Reframing)’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활발하게 놀지 못한다’는 절망 대신, ‘오늘 연서가 숨을 고르게 쉰다’거나 ‘포화도나 심박수 수치가 안정적이다’는 사실에서 작은 승리를 찾아냈습니다.
또한 ‘감사(Gratitude)’의 근육을 키웠습니다. 연서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했고, 해맑은 연우와 내 곁을 지키는 아내의 존재에 진심으로 고마워했습니다. 병원 의료진의 노고에도 감사를 표하며 내면의 평화를 찾아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정(Acknowledgement)과 공감’입니다. 연서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였으며, 이 상황을 겪는 우리 가족 모두의 아픔을 서로 연민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힘인 회복탄력성은 그렇게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행복은 선택이자 능동적인 실천
행복은 가만히 앉아 기다리면 찾아오는 요행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움직임’ 속에, 즉 내가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할 때’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중환자실 면회 시간을 1분이라도 더 얻기 위해 병원 복도를 달리던 절실함으로, 행복 또한 온몸을 던져 쟁취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탈 벤 샤하르 교수는 “행복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했습니다.‘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며, 행복이 외부 환경이 아닌 나의 의식적인 선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시인 아이스킬로스의 말처럼, 행복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선택이었습니다.
진정한 유능감과 가치감
명나라 철학자 왕양명은 자존감을 ‘유능감’과 ‘가치감’의 합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한때 나의 유능감은 바닥을 쳤습니다. 사회적 성취가 무의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깨닫습니다. 진짜 유능감은 업무 처리가 아니라 연서의 작은 변화를 알아채는 세심함에 있고, 진정한 가치감은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아이들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부모로서의 헌신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는 이제 나의 고통과 연서의 아픔, 연우의 질문과 아내의 눈빛까지 삶의 모든 조각을 나를 성장시키는 소중한 소재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역경 속에서 제가 발견한 가장 값진 지혜였습니다.
행복은 삶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 의미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누구에게 “웃어라”라고 명령할 수는 없지만, “웃을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하면 그는 웃게 됩니다. 연서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는 삶의 가장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하는 이유이자 기적입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
삶은 때로 잔인할 만큼 가혹하지만, 행복은 거창한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며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들려오는 연우의 웃음소리, 서툰 그림을 내밀며 아빠를 부르는 그 작은 목소리에서 나는 충만한 행복을 발견합니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연서의 기적 같은 생명력에서 삶의 강인함을 배웁니다. 아내와 마주 앉아 나누는 소소한 대화는 거대한 파도를 넘어서게 하는 작은 배가 되어줍니다.
어쩌면 이 모든 고난은 내가 잠시 멈추는 법을 배우고,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게 하기 위한 과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아픔에 갇히지 않을 것입니다. 연서와 연우,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우리는 오늘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순탄치 않더라도, 일상의 작은 행복들을 연료 삼아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