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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로드 Sep 29. 2023

50% 딩크를 추구하던 불안정애착 어른이

나의 자가면역질환 치유기#4

사실 가족과 절연을 하게 된 건 '자가면역질환 치유'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새로운 가족이 이전 가족 같은 분위기가 되는 거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혹시나 엄마가 내 흉을 본 그 친척들을 명절에 잠깐이라도 마주친다면, 그들은 내게 물을 거다. "왜 결혼식을 안 했니?" 거기에 나는 폭발할 것만 같았다. "소아우울증 아세요? 저 소아우울증이었다고요! 그게 뭔지 알기나 하냐며 소리 지르며 눈이 뒤집혀 미친년처럼 울부짖을 것만 같았다. 5살 이후부터 시작된 우울증과 불안장애 그게 번져서 청소년과 성인까지 이어지며 어린 시절 친구도 없이 무슨 결혼식을 하고 싶겠느냐는 말이다. 죽은 것과 다름없이 숨만 쉬며 버텨온 그 몇십 년의 세월 동안 내 인생을 살지 못했는데, 거기다 함부로 지껄여대는 부모들 모시고, 또 나는 얼마나 망신을 당해야 하며, 굴욕을 견디라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친정은 가지 않는 게 맞다. 한 십 년은 말이다.


첫 아이를 유산한 경험이 있었는데, 당시 거울명상을 하니 얼굴은 해골바가지처럼 두려운 기색을 보이며 겁에 질려 울부짖었다. 내 영혼은 3인 이상의 가족이 되는걸 극도로 공포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이런 나의 사정을 모른 채 도대체 뭐가 그리 두렵냐며 아이가 없는 관계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인공수정을 시도하며 배란유도제를 맞자 얼굴은 울그락풀그락 올라왔고, 동시에 엄청나게 가려워 고통스러웠다. 그 무렵 내 오랜 내면의 습관대로 또 한 번 자살 충동이 올라왔다. 는 솔직하게 말했고, 그는 "무슨 그런 생각을..."이라는 생각을 내비쳤다. 안정적 애착유형의 인간은 절대 이해 못 할 세계였다. 내 몸의 상태에도 남편은 "좀 만 참으면 되는데......"라며 못 마땅해했다. '처음 만날 때부터 아이는 꼭 갖지 않아도 된다더니...... 결혼 3년이 지나고 서로에 대해 맹숭맹숭 해지니 너도 어쩔 수 없구나......' 그런 남편이 야속하게만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아쉬웠다. 딩크로 즐겁게 사는 부부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들은 취미를 즐기며 바쁘게, 재밌게 사는 듯했다. 나는 이 관계를 어찌할 줄 몰라 법륜스님 강의를 들으며 108배를 시작했다. 남편에게 '살아주어 고맙다'며 절을 하니 신기하게도 내 마음과 태도가 변하더라. 동시에 남편의 마음도 전처럼 돌아왔고, 우리는 예전처럼 여행계획을 세웠다. 그는 나와 즐겁게 여생을 보낼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안에서 어떤 아쉬움이 올라왔다. '아기 없이 우리끼리 여행 다니는 삶에 대해 적어도 몇 %는 아쉬운 느낌이랄까?' '낙이 없는 느낌이랄까?' 생각해 보니 '내가 아기를 싫어하나?'싶었다. 만일 결혼을 하지 않은 능력 있는 여성이라면, 방송인 사유리 씨처럼 정자를 사서 아기를 낳아 함께 사는 것도 좋아 보였다.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여느 딸처럼 '남성혐오증'도 있었는데, 불안정애착에서 온 왜곡된 인생을 향해 나도 모르게 나의 마음이 향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굳이 3인 이상의 가정이 싫어 정자를 받아 2인 가정을 추구하다니......


 분명한 건 나는 딩크를 바라는 게 아니라 이전 가족의 트라우마에서 못 벗어나 두려움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거다. 또다시 그런 견딜 수 없는 가정의 형태가 된다는 건 생각만 해도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사실 이혼을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배란유도제로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뻔히 보고도 인공수정을 종용하는 그를 두고 사랑이 아니라고 확신했었다. '당신은 건강하고 좋은 여자 만나 아기 낳아라' 하고 나는 혼자가 되는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이 이어졌다. 내 몸은 온몸으로 아기를 거부하는 것만 같았다. 피임약 먹어보았지만 호르몬 작용으로 얼굴 더 울긋불긋 올라왔다. 피임약도 포기. '루프'같은 피임법도 있다던데, 몸에 뭘 하는 것도 내 몸이 받아들일지 의문이었다.


무엇보다도 혼자가 되는 선택을 하기에는 나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불안정애착에서 안정적 애착형으로 바뀌었다고 자부했지만 그동안의 의존성 성격장애를 겪으며 여러 가지 고초들을 겪었고, 더불어 외로운 시간들과 집순이 삶이 익숙한지라 고민이 깊어졌다.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갈까도 고민했다. 나는 명상과 채식, 108배도 하며 인생의 진리를 추구하던 사람이니까. 고아원 가서 봉사하며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란 인간은 행동을 하기까지 100만 년이 걸린다. 그 삶이 그리 녹록하게 여겨지지도 않는다며, 득도는 지금 여기서할 수 있다며 자기 합리화를 시작했다. 오히려 그 세상의 모순적인 모습에 혐오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 내가 그릇이 안 돼 모순적으로 변해갈 수도 있다. 그냥 내어 맡기기로 했다. '이러나저러나 한번 사는 인생. 몸 건강이 많이 두렵긴 했지만, 건강하게 아이 없이 오래 사는 게 꼭 그리 좋아 보이는 것 같지도 않다고 생각해 버렸다.


이번 임신초반에 사실 내 마음의 50%는 기쁘지 않았다. 어린 시절 고통을 겪은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임신초반에는 그 공포가 올라오는걸 몸이 보여줬다. 전신홍반성루푸스라는 7년 전 진단명이 무색할 정도로 무릎 주변 팔꿈치 주변을 넘어 팔 전체가 울불긋 올라왔다. 무섭기도 했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이번 임신에 대해 내가 선택했다는 생각을 분명히 하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나도 아이를 원했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었다. 태아 때 트라우마를 알기에 태아에게 미안하다고 끊임없이 말해주었다. 그러자 팔꿈치 주변과 무릎 주변의 발진이 점점 가라앉았다. 불안정애착의 두려움을 느껴주고, 동시에 왜곡된 생각을 바꿔 생각에너지를 바로 쓴 결과였다.


그리고 이전 가족에서 겪은 어려움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며, 연락을 하지 않게 유도했다. 유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이기는 했다. 더 이상 전처럼 연락을 하지 않으며 나는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고 있다. 이번에는 얼굴피부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연락을 안 해주어 너무 감사하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딸이고, 누군가의 동생이 아니다. 이전 가정에서 영향받은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나라는 독립된 한 인격체로 새로운 가정을 현명하게 지혜롭게 가꾸어 갈 수 있을 거라 스스로를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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