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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로드 Sep 24. 2023

아이에게는 엄마 냄새가 난다.

엄마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다(나의 자가면역질환 치유기#6)

아이에게는 엄마의 냄새가 난다.

엄마가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면, 밖에서도 걱정스러운 사람이 되고,

엄마가 밉살스럽게 보면 밖에서도 밉살스러운 사람이 된다.

- 진실이 치유한다, 데보라킹



어린 시절의 상처로 인해 5살 어린 마음으로 20살이 되고 30살이 되던 나에 대한 엄마의 시각은 어떠했던가?


 "걱정이야. 넌 뭐든 잘 못하잖아."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인생의 절반을 보냈다고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졌다. 나의 엄마라는 존재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도 모르는 것 같다. 그냥 점수만 보고 판단하고, 돈을 얼마나 버는지를 보고 평가를 할 뿐이다. 애정결핍으로 살아오느라 의지할 곳 없이 정처 없이 해메이던, 방황하던 어린 마음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오만상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나의 2~30대 엄마에 대한 기억이다. 10대 때는 대화해 본 기억이 없다. 어릴 때는 남편과 싸우느라 5살 아이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으며, 지독한 외로움에 벽만 보고 유아기 3년을 보낸 것에, 그게 그 후 몇십 년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왜 지나간 일을 기억하냐"라고 다. 53년생 이하정은 그런 사람이다.


얼마 전 장문의 메시지를 보낸 이후, 계속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 덕분에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는지 나의 피부가 점점 희어지는 느낌이다. 피부질환의 무의식적 원인은 '수치심'이라는데, 그들의 나를 향한 그 굳어진 시각에서 벗어나는 덕분인 것 같기도 하다. 버림받은 무의식으로 인해 나 스스로를 버리며 살아왔다. 존성 성격장애로  목소리를 무시한 채, 그들이 '문제아', '못난이'로 보는 시각에 조종당하며 살아왔다.


효도를 바라는 것 같은데, 사랑을 받았다고 느끼면 자연스럽게 돌아갔을 거 아닌가. 자식들 위해 희생했다고? 당신은 그저 당신의 인생을 살았을 뿐이다. 아들을 낳고자 셋째까지 낳아 고생했던 건 당신의 선택이었지 나를 위해 희생한 게 아니다. 막상, 여자아이라 실망했던 건 내가 딸이어서 내 존재가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고, 당신의 낡은 사고가 문제였다.


"조금만 배웠으면 이혼하거나 도망갔을 텐데 그냥저냥 일하고 살았다"라고 한 번씩 얘기했던 엄마였다. 집에만 있는 아빠를 보며, 답답한 집을 피해 밖으로 나가면 그나마 숨 쉴만하다고 했다. 그 가운데 어린 나는 어했던가? 집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겉돌았다. 집에서 엄마의 눈길을 받았던 기억이 손에 꼽는다. 어색하고 불편한 사이일 뿐, 6살에 생긴 불안장애인 선택적 함구증으로 인해 벙어리냉가슴처럼 살았으니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도 없다. 미 어린 시절부터 내게 '마'라는 존재는 의지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 모든 희생이 사랑이었을 거라고 이해해보려고 했다. 젠장. 몇십 년을 마음고생하고 밖에서 치이다 겨우겨우 힘들었다는 얘기를 어렵게 꺼냈는데, 그걸 두고 학교서 못 배웠냐며 친척들에게 걱정이랍시고 내 욕이나 하고 있다니......  정말 이젠 질려버렸다.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한 십 년 안 보면 좋겠다.


도서 [진실이 치유한다, 데보라 킹 저]를 보면 '원인 모를 질병'과 그로 인 고통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도 나와 같이 자책하고, 감정을 억누르다 병이 생겼다. 그러다 어린 시절 환경과 엄마에 대한 기억을 진실되게 보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치유의 길로 들어선다. 굳이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이었다고 애써 스스로를 설득하는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가면역질환은 수치심이 자기학대로 변하여 스스로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수치심의 근원을 파헤치는 과정이 '치유의 과정'이 된다. 나의 엄마에 대한 기억을 파헤쳐 그동안 내가 문제라며 나를 자책하던 것들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 나는 차마 '5살 아이가 잘못했다' 말할 수 없다. 그 아이는 잘 못 한 게 없기 때문이다. 수년을 방황하여 고민하, ' 문제'라 그들이 내게 던진 화살들. 그 화살을 다시 그 당시 영향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돌리는 작업. 그야말로 '루저의 남 탓'인 것 같지만, 진실을 객관적으로 보 '인식전환'의 과정 말로 치유의 과정에 반드시 필요하다. 

실제로 이런 과정을 겪으며 나 루푸스 수치는 나아지고 있으니까. 이 과정 이후, 내가 좀 더 성숙하면 그 모든 상황을 그저 관찰자 시각으로 보며 이해할 수 있는 때가 오기도 할 것이다. 나도 예수나 석가모니처럼 그 모든 사람들에 자비와 연민을 갖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해할라치면 못할 것도 없다. 그 당시 시대와 그들이 살아왔던 환경을 비추어보면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로 옆에 있어주고 삼시세끼 밥을 챙겨주는 일은 보통 힘든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의 최선에 감사한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내 5살 어린아이에게만 연민을 주야 하는 시점이라 여겨진다. 아직 그 모든걸 자기 잘못으로 알고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는 아이. 아직 그들이 감정쓰레기통으로 대하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의 어린 내면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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