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날들로부터
글을 쓰기로 한다.
무슨 글이 될 것인지. 무슨 기록을 할 것인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채로 다만 컴퓨터 앞에 앉았다.
무엇이든 여기 내려놓으면 지금 이 마음이 조금 가라앉을 것이라 믿는다.
어떻게든 여기 써내면 지금보다 나아질 스스로를 믿는다.
그렇게 곱씹고선 글을 쓴다. 무엇이든. 어떤 말이든.
악의가 깃든 무엇인가로부터 어딘가 자꾸 점령당한다.
그 무엇인지 모를 것은 나도 모르는 새 내 어딘가로 침투하고, 침투하고 잠식하여
종국에는 내게서 그것을 앗아간다.
어떤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우칠 수 있던 힘이 내게도 있었다.
그것이 내게서 시작된 나의 적인지, 외부로부터 파생된 적인지 구별할 수 있던 힘이 내게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 병들고,
올 가을부터 시작된 끝을 알 수 없는 이 전쟁은 종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내 안의 적은 내가 잠이 든 순간, 내가 울적해지는 순간, 내가 잠시 넋 놓는 모든 빈틈마다 공격하고
나는 그 탓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지금.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삶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혼돈과 혼란 이 경계 속에서
마지막 최후의 보루처럼 삶의 이유에 대하여 끊임없이 묻는다.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여기 무엇인지.
나는 누구였던지.
다만 나, 무엇을 위하여 이 날까지 살아왔는지.
삶을 사랑하는 일보다 더 지독한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
이토록 나를 간절하게 하고, 이토록 원하게 하고, 이토록 기다리게 할 수 있는 지독한 사랑이 또 어디 있을까.
살아가는 것 또한 사랑하는 일과 같은 것이라면
그런 것이라면 나는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이 것과 나, 내게 주어진 운명 그 순간까지 공생하기 위하여 나는 이 삶을 또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러나 나, 이제 이 외사랑을 그만하고 싶다.
내일을 사랑하는 일, 오늘을 간절히 여기는 일. 머나먼 저 어딘가를 바라보는 일.
그 모든 순간으로부터 도피하고 싶다.
그리하여 더는 내가 아프지 않은 곳으로
더는 내가 쓸쓸하지 않은 곳으로 도망칠 수 있다면.
그렇게 쉬이 놓을 수 있는 외사랑이라면 거뜬히 내려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