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알아주기
나는 나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데 둔하다.
다른 사람의 기대와 기분을 맞추는 게 훨씬 편했고,
나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은 원초적으로 불편했다.
문제는, 분명히 내가 어떤 상황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있는데,
내가 스스로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아니면 애써 무시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내 안의 나는, 고여 있는 물처럼 서서히 썩어가고 있었다.
학교나 친구 관계에서도 의견을 말하기보다 다수의 의견에 따라가는 편이었고,
당장의 내 감정보다 ‘분위기’가 우선이었다.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습관이 차곡차곡 쌓였다.
정작 삶을 살아가는 ‘나’는 중요한 순간에도 스스로의 기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준에 따라 움직였다.
외할아버지는 초등학교 교감선생님이셨다.
어릴 적부터 한문과 글씨 쓰는 법, 일본어에서 파생된 한글의 유래, 한문의 중요성까지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셨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사랑과 관심 덕분에 ‘좋은 어른이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을 품었고,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나의 큰 목표이자 보람이었다.
그래서 고3이 되어 대학교를 선택할 때도, 고민 없이 외할머니가 좋다고 하신 대학을 골랐다.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 ‘나를 위한 고민’이 없었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마다 나를 위한 시간이 없었던 내 인생이 온전히 ‘나를 위한 인생’으로 바뀌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작은 나의 감정을 스스로 포착하는 일이다.
“아, 내가 이런 상황에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구나.”
“그래,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당연한 거야.”
하지만 30년 넘게 무시하며 살아온 습관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감정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의 상황, 그때의 감정, 그 감정에서 이어진 생각까지.
차곡차곡 쌓다 보면 언젠가는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지 않을까.
목소리를 낸다는 건 갈등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건 나를 스스로 알아주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