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를 위하여
얼마 전,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며칠 뒤의 날짜를 지정해 주며 그날 시간이 되는지 내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거제도에서 살고 있었지만 한 달에 두어 번 서울로 사업교육을 들으러 올라오고 있었고 내가 거제를 떠나고 나서 처음으로 나에게 만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백수인 내가 그날 하루 일정을 빼는 일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꼭 그런 이유보다는 이제는 그녀와 다시 웃으며 대화할 용기가 생겼기 때문에 나는 곧장 만남에 응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다소 강한 성격이었다. 함께 살던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면 온 가족이 그녀의 눈치를 봐야 했고, 겨우 한 살 차이이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꼼짝도 못 하는 동생이었다.
아빠도 그녀의 뾰족한 성격을 이기지 못했고, 맏이답게 할 일은 잘하는 편이었으니 반쯤 포기한 채로 시간만 흘려보내야 했다. 그녀가 성인이 된 후 어느새부턴가 철이 들었는지 가족들을 살뜰히 챙기는 모습을 보였고, 온 가족들은 뒤에서만 그녀의 칭찬을 수군거렸다.
그래도 사람 쉽게 안 변한다고 평범한 대화 중에도 불쑥불쑥 그녀의 고집은 튀어나왔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한 번 화가 나면 상대를 지나치게 비난하는 말투였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이 안 좋은 사건으로 불안정하던 나를 위해 언니가 있는 거제도로 가자고 했을 때,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언니와 오래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가끔 보는 모습으로는 그녀의 잠재된 본능이 많이 사라졌다고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카페를 접고 다시 거제도를 떠나기 며칠 전 날, 나는 형부와 남편 앞에서 언니와 소리를 지르며 말다툼을 벌였다. 한참 예민해져 있던 나에게 언니는 평소와 같이 사소한 지적을 했고,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린 내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폭발을 해버린 것이다. 그녀는 그때 본인이 건든 조각이 나에겐 이성을 지탱하던 마지막 조각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나는 "한동안"이라는 표현으로 가족들에게 내게서 몇 발짝 떨어져 주길 바란다고 말했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원했던 "긴 멀어짐"을 말하고 싶었다.
결혼식 전까지도 그녀와 화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격렬하게 거부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녀의 마지막 조각을 건드렸었다는 것을 나중에는 깨닫게 되었지만, 아빠나 형부가 부탁하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사과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한두 번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는 이내 다시 머릿속에서 그녀를 지웠다.
결혼식에서는 그냥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대화도 했지만, 이야기가 겉돌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결혼식 이후로 처음 친정에 갔던 날, 아주 못생긴 얼굴로 울고불고 난리는 부리는 철없는 나를 본 언니는 한 번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 적 없는 부드러운 온도의 위로를 건네주었다.
"나도 혼란스럽더라. 내가 누군지 모르겠고, 마음에 병이 막 오려고 하더라니깐? 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려고 하다 보니까 좀 나아졌어. 나는 공감능력이 좀 떨어지는 것 같아."
내가 알던 언니는 자신을 낮추면서 상대를 위로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충고와 지적이 빠진 순수한 위로를 하는 언니는 먼가 약해져 있어 보였다.
그날 우리는 신도림역에서 만나서 점심을 먹었다. 형부와 조카도 함께였는데, 형부의 얼굴이 조금 피곤해 보였다. 거제도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그는 언니와의 잦은 다툼에 지쳐 삶의 생기를 잃어버린 얼굴이었다.
그래도 전보다는 많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었지만, 언니의 꿈을 돕기 위해 매번 이렇게 따라다니며 고생하는 형부에게 가족으로써 미안함을 느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형부와 조카는 어린이연극을 보러 갔고, 언니와 나는 동대문 원단시장으로 향했다. 그녀는 미싱 공방을 운영하면서 정부지원사업을 통해 어린이용 운동복을 제작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둘이서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어느 자매들과 같이 서로 틱틱거리며 말장난을 하고, 예쁜 천을 보면 호들갑을 떨었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징징대는 조카와 커다란 캐리어를 양손에 쥐고 형부가 등장했을 때, 나는 바로 위험신호를 감지했다. 형부는 땀이 많은 사람인데, 땀을 닦을 여유도 없이 우리에게 왔는지 온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우리를 만난다고 나아지는 게 어디 있겠나. 바글바글 원단시장건물안에서 인내심이 바닥난 형부는 휙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바로 눈알을 굴려 언니를 쳐다봤다. 이러다 부부싸움이 날 것만 같아서 어떻게 말려야 하나 벌써 난감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나 부모와 언니의 대립을 말리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내가 문제를 일으킬 땐 언니가 많이 힘들었겠지만.
언니는 형부의 뒷모습을 보며 내게 설명했다.
"형부는 이런 상황이 많이 불편한 거다.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이라도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되게 징징대는 거 못 견뎌하거든. 오로지 정신력으로 버티는 중인 사람이다."
으엥? 왜 화를 안 내고 조카에게 아빠를 힘들게 하면 안 된다고 교육을 하고 있지? 나라면 화를 냈을텐데.
일단 형부를 쫓아가야 할 것 같아서 빠르게 계단을 타고 내려와 구석에서 멍하니 서있는 형부에게 말을 걸었다. 내심 우리 언니 때문에 고생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서 괜히 장난스레 말투를 늘어뜨렸다.
"형부. 많이 덥죠? 형부 아들 내려오면서 호온 났어요 아주. 언니가 형부 힘들게 하지 말라고 얼마나 혼을 내던지. 우리 언니 아직 어린 나이라 애인 줄 알았는데, 길에서 딱 혼쭐도 내고 대견하다 그렇죠?"
형부는 가만히 몇 초 있다가 짧게 대답했다.
"언니 원래 잘한다."
그날 밤 퇴근한 남편은 잘 놀다 왔냐며 오늘 했던 모든 것들을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그는 내가 하루종일 무얼 했는지를 듣는 것을 참 좋아한다. 내가 그에게 내 소소한 일과를 말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좋아한다고 했다.
시간의 흐름대로 오늘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말해주다가, 얼마 전 아빠와 통화할 때 있었던 짧은 대화가 불쑥 생각나서 이야기의 흐름을 끊고 바로 그에게 말해주었다.
"내가 아빠한테 언니 요새 많이 성장한 것 같다고 하니까 아빠가 허허 웃으면서 맞다고 했다? 진짜 웃기지?"
내 말을 듣고 웃을 줄 알았던 그는 몇 초간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주 옅은 미소를 띠고 있긴 했지만 나를 뚫어져라 쳐다만 보는데, 갑자기 내 영혼이 그의 눈빛을 따라 내 안으로 훅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무릎 위에 올라가 있는 두 손을 내려다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나 이제 알 것 같아. 내가 그동안 왜 가족들을 미워하고 두려워했는지.
나를 수용하지 않는 표정과 말들을 들을 때마다 정말 속상했거든? 나를 사랑한다는 건 아는데, 자꾸만 나를 아프게 하는 말만 하니까.
처음에는 혼자 어떻게든 그 사람들 마음을 꿰뚫어 보려고 했는데 아니 기다려도 보고 부탁도 해봤는데 그래도 계속 속상한 말만 하니까. 나중에는 아빠도 언니도 '진짜 나'를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확신했어.
혼자 오해가 쌓이니까 아예 확신에 차버려서 줄곧 가족들을 피했던 것 같아."
내가 꿈을 꾸는 것처럼 혼자 중얼거리는데도 그는 가만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나는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 맞아! 아빠도 언니도 나도 모두 서로에게 오해를 하고 있던 거야!
모두 본인을 사랑하지 않을까 봐 불안했던 거야. 아빠는 우리가 아빠를 진짜 사랑하는지 확신이 없어서 자꾸만 통제하려고 했고, 언니는 칭찬이나 사랑한다는 표현을 많이 못 들어서 누군가 잘못하면 몰아세웠던 거야 본인이 당했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 모두의 방식은 사실.. 사랑해서 그랬던 거야..
난 나만 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 우리 가족들이 다 이제야 크고 있었나 봐.
지난 시간 동안 모두 성장을 멈추고 꾸역꾸역 살아내고만 있다가, 이제야 크느라 서로가 다 아팠나 보다."
아빠는 몇 년 전 17년 동안 유지했던 결혼생활을 정리하면서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처음부터 맞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젊었던 아빠는 본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버텨야 했다. 물론 언니와 나도 함께.
친구도 거의 안 만나고 월급을 죄다 집에만 가져다주던 아빠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머리가 히끗한 나이에 혼자가 되었고, 딸들은 다 커서 멀리 떠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와 그동안 잘 살았다고, 당신 인생 가치 있는 삶이었다고 말해주며 처음 이혼했을 당시의 젊었던 청년에서 멈춰버린 아빠를 다시 성장시키기 전까진, 다 커버린 두 딸에게 이제 와서 어떻게 미안함과 사랑을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고 있었다.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를 유독 더 좋아했다. 예전에는 그냥 맏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는 알게 되었다. 엄마는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인정하는 따뜻한 사람이니까.
언니와 거제도에서 함께 지낼 때 그녀의 부부싸움을 하루가 멀다고 보았다. 나는 원래 언니가 뾰족한 부분이 있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형부가 힘들어하는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형부를 만나고 그제야 클 수 있었던 언니는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진정한 나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 언니의 강한 의지를 형부는 몸으로는 도와주면서 말이나 표정으로는 자꾸만 밀어냈고, 절실하게 스스로를 찾고 있던 언니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의 부정적인 반응이 너무 큰 상처가 됐을 것이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점점 손이 가는 일이 덜 해지자, 부부는 차츰 여유를 되찾았다. 다시 한번 서로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두 사람이 조금 더 어른이 되었다.
누구 한 명 앞설 것도 없이 우리는 함께 크는 중이었고, 아이가 크기 위해 잔병치레를 겪어야 하 듯이 우리도 어른이 되기 위해 기필코 아파내야 했다.
당장 내가 너무 아프니까, 서로의 성장통을 나쁜 선택 또는 이기적인 마음이라 오해한 날들이었다.
지금 내 마음은 몇 살쯤 일까. 아직 세상을 유유히 여행하기엔 부족한 것 같은데.
다시 말이 없어진 나를 보며 그가 웃었다.
다시금 움츠려 드는 감정에 얼른 태클을 걸어왔고, 그가 내 손을 잡고 생각의 구덩텅이 밖으로 얼른 빠져나왔다.
결국 사랑이 사람을 성장시키는구나.
"우리 가족사진 찍자. 아빠랑 아빠 짝꿍이랑, 언니랑 형부랑 조카랑, 나랑 너랑 다 같이 말이야."
"그럼. 좋지. 하고 싶은 거 다 하자 앞으로 더."
나의 뒤늦은 성인식은 작은 집안에서 단 둘이 흔한 케이크도 하나 없이 치러졌지만, 지난 그 어떤 생일보다 더 의미 있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