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
엄마 집에는 서른 살 정도 된 플라스틱 휴지통이 있다. 엄마가 그 휴지통을 구매할 때 그 당시 최신 유행하는 디자인으로 고심해 골랐을 확률은 0에 수렴하지만, 엄마는 화장실 쓰레기를 비울 때마다 쓰레기통을 잘 닦아 말려 변기 옆에 놓았다. 우리 집은 이사를 세 번도 넘게 했지만 늘 화장실에는 단단하고 한결같은 초록색 쓰레기통이 있어서 어딘가 고맙고 편안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스무 살 상경해 자취를 하고 나서부터 나는 거의 일 년마다 쓰레기통을 버렸던 것 같다. 끈적이는 얼룩이 지워지지 않아서, 냄새가 잘 안 빠져서, 이사하다 잃어버려서, 색이 마음에 안 들어서.. 갖가지 이유를 대 가며 열심히도 버렸다. 쓰레기통뿐만 아니라, 옷이든 신발이든 하다못해 연필 한 자루까지도 자주 버리고 더 예뻐 보이는 것으로 새로 샀다.
뭐든 쉽게 질려하고 새로운 자극을 찾아다니는 나 같은 사람에게 유행을 타는 물건은 끊임없이 신선한 기분을 불어넣어 준다. 사회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과 하는 잡담에서 빠지지 않는, 유명한 사람들이 하고 나오는, 유튜브와 SNS 이곳저곳에서 자꾸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내 손안에 있다는 사실만큼 쉽게 소유욕이 충족되는 건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근 십 년 간의 내 소비 습관을 곰곰 돌아보면 유행을 따라 큰 고민 없이 산 것들은 꼭 큰 고민 없이 쉽게 버리게 됐다.
한편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니는 물건들이 있다. 몇십 년, 몇 백 년의 역사를 내세우는 브랜드의 가방, 가구, 그릇, 종이 같은 것들에는 오랜 시간 동안 빛이 바래지 않는 당당함과 자신이 깃들어 있다. 정말 큰 마음먹고 구매를 결정해야 하기는 하지만, 보통 오래 고민한 만큼 적게 후회하는 것 같다. 타인의 경험이 말해 주는 소비의 지혜라고나 할까. 돈을 많이 쓰고도 후회하면 너무 속상하니까 후회를 못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기본적으로 물건을 자주 사는 성격은 아니지만(누군가는 니가? 라고 반문하겠지만 나는 정말 먹고 마시는 것 외에는 돈을 잘 쓰지 않는다!), 좋은 물건 하나를 아끼며 사는 것이 조금 더 편하고 행복하다는 걸 깨달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미니멀한 삶을 살고 싶다기보다는 좋아하는, 좋은 물건들에 오랜 애정을 쏟으며 맥시멀하게 사는 삶이 요사이 내 목표가 됐다. 왜, 오랜 시간 사용한 물건에는 도깨비가 깃든다고 하잖나. 내가 사용한 물건들에 머무는 도깨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물론 유행을 좇아 이것저것 소비해 보며,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어 가며 자신의 취향을 찾아가는 길이 즐겁고 의미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랑 없이 만들어져 빠르게 쓰고 버려지는 수많은 물건들을 생각하면, 좋은 것들을 발견해 내는 눈을 기르는 데에도, 우리가 사는 환경을 보전하는 데에도 시작부터 좋은 물건을 골라보는 게 훨씬 좋은 선택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