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
신던 신발이 해어졌다. 뒤꿈치 안쪽을 보니 안감이 닳아 구멍이 뚫리고 고무 부분이 드러나 있다. 혹시나 해서 발바닥 부분을 보니 밑창도 다 닳았다. 밑창의 무늬가 마치 등고선처럼 땅의 모양을 닮아 멋진 신발이었는데. 비 오는 날만 되면 지하철 바닥이 자꾸만 미끄러웠던 것이 고무 밑창의 요철이 마모되어 그랬나 보다. 신발끈을 꽉 묶지 않고 헐렁하게 신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가 걸을 때면 발을 높이 들지 않고 바닥에 끌면서 걷는 습관 때문에 신발 수명이 짧다. 봄부터 내내 신었더니 겨울까지 버티지 못하고 그만. 신발을 살 때가 되었다.
해졌던 그 신발 브랜드에서 다시 신발을 주문해 요 근래 신고 있다. 사이즈도, 발 너비나 착용감도, 가격과 퀄리티 모두 익숙하고 편했다. 오프라인에서 신어보지 않고도 주문할 수 있다는 것이 이미 경험해 본 브랜드의 장점이다. 그러고 보니 나에겐 매년 여름이 오기 전에 주문하는 여름용 신발도 따로 있다. 한 브랜드에서 똑같은 라인으로 색만 바꿔 여름마다 신은지 이미 4, 5년은 된 것 같다. 다음 여름이 오면 또 하나 구매할 예정이다.
날이 추워져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뒀던 목도리를 꺼냈다. 검은색 캐시미어 소재의 가벼운 목도리로, 몇 년에 걸쳐 사용하고 있다. 까끌거리지 않고, 실내에선 언제든 돌돌 말아 가방에 넣을 수 있어야 하고, 어떤 옷을 입든 가리지 않고 매기 좋아야 하고, 묶지 않고 목에 걸치거나 한 바퀴 감아 둘러도 되는 적당한 길이의 목도리는 생각보다 흔치 않다. 검은색인 데다가 떨어뜨려도 소리가 나질 않아 바닥에 흘리거나 어딘가에 놓고 오는 바람에 몇 번이나 잃어버릴 뻔했지만, 모든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찾아 목에 둘렀다. 눈에 띄지 않는 형태와 색이라 다른 사람들은 내가 같은 목도리를 주구장창 매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나에게 맞고 편한 그 목도리는 꽤 소중하다.
목도리처럼 유행을 잘 타 지속적으로 생산하지 않는 물건들을 잃어버릴 때면,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는 생각에 그 물건이 눈에 아른거린다. 잃어버렸던 그때로 잠깐만 다시 시간을 돌리고 싶다. 잘 챙겨서 잃어버리지 않게. 항상 놓던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한동안 계속 받는다. 잃어버리지 말아야겠지만, 내 마음처럼 되질 않아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좋은 물건들은 집에 몇 개씩 쟁여놓아서 잃어버려도 속이 상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줄곧 사용하다 보면 질릴 만도 하고, 새로운 시즌에 나오는 아이템에 혹할 만도 한데 (그렇다고 사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최애가 계속 최애일 뿐.) 계절이 지나고 해를 넘겨도 다시 찾게 되는 물건들이 있다. 유행과는 상관없이 나에게 편하고 좋은 물건. 아니면 나의 유행은 한 계절이 아니라, 한 해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긴 기간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만 적용되는 한정적이고 속도가 아주 느린 유행에 따르고 있는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