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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남아 주는 것들

<집>

by 빈부분

지난주 일요일, 이사를 했다. 스무 살이 되어 서울로 상경한 지 칠 년, 꼬박 아홉 번째 이사였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물건 정리를 하기도 했었고 쇼핑을 즐기는 성정도 못 되는 까닭에 옮길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낑낑대며 짐을 모두 싣고 나니 작은 용달 트럭 하나가 꽉 찼다. 잠시 숨을 돌리고, 용달차 앞좌석에 끼어 앉아 오빠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삼십 분 정도를 달렸다. 나의 전 재산(?)과 함께 도로를 달리는 건 처음이어서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용달차가 한강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나의 존재는 이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겠구나, 같은 생각.

이사할 집에 도착해 짐을 내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용달 아저씨가 손을 탁탁 털며 떠나고 오빠와 둘이 차곡차곡 짐을 날랐다. 마지막 상자를 옮기고 중국집에 전화를 걸며 비로소 실감이 났다. 이제 이 곳이 또 새로운 나의 집이다.

칠 년 동안 크고 작은 집(또는 방)으로 이사를 하며 점점 확고해진 사실은, 가진 게 많다는 건 그만큼 돌보아야 할 것도 많다는 뜻이라는 거였다. 내가 기억하고 돌볼 수 있을 만큼의 짐은 나의 삶을 풍요롭게 했지만 나의 손이 닿지 못하는 것들은 줄곧 먼지가 쌓이고 어딘가 찐득해지거나 썩어 나를 곤란하게 했다. 기억하지 못한, 못할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많이 버렸지만 아직 먼지 쌓인 물건들이 많다.

건축은 대개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기에 물리적인 부피와 공간을 갖춘 곳을 집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 생각해 보면, 시간이나 공간이 흘러가고 변하는 가운데에서도 곁에 남아 주는 것들이 나의 집이었다. 몽골의 게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람들과 가축들이 이동하는 장소를 따라 다시 생기고 또 사라진다. 그렇게 가족의 품이 있는 곳, 익숙한 공기의 냄새, 오래도록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나무 같은 것들은 늘 집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때로는 짐이 집이 되기도 한다. 커다란 짐가방 하나, 작은 짐가방 하나에 배낭 한 개 메고 딸랑 도착한 스페인에서, 가방 하나가 전 재산이었던 인도에서, 열흘간 걸어 도착했던 산티아고에서 내게 익숙한 담요, 양말, 노트 같은 것들은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자 집이 되어 주었다. 그때 나의 짐들은 보통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이었는데, 예를 들면 여행 중 매일 펼치고 잤던 침낭, 칫솔과 조각비누, 노트와 연필이 들어 있는 작은 파우치 같은 것들을 꺼내 늘어놓으면 그게 어느 공간이든 집처럼 아늑하게 느껴지는 거다. 익숙한 것들이 집이 됐다.

몽골의 초겨울, 별하늘 아래에서 보았던 게르


크기가 조금 크다 뿐 집도 결국은 물건이다. 꼬르뷔제 아저씨가 말한 것처럼, 살기 위한 기계다. 그러나 나를 위한 공간이 먼지 쌓이고 끈적해지지 않도록, 부품이 녹슬지 않도록 집의 모든 구석에 시시콜콜 참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집이 나에게 집이 되어 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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