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의 회복

프라모델과 행주 사이

거의 이십 년 전의 일이다.

우연히 같이 공부를 하던 친구의 방에 간 적이 있었다.

당시 그 친구는 스물여덟쯤 되었고,

혼자 원룸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좁은 원룸 한쪽 벽면에

프라모델 박스가 잔뜩 쌓여 있었다.

완성된 것들은 선반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너, 이런 취미가 있었어?"


나는 웃으면서 물었다.

보기와 달리 오타쿠였구나 싶었다.


"형, 이건 취미라기보다는 힐링이에요."


힐링?

그 친구는 진지한 얼굴로 설명했다.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피곤하다.

그럴 때 30분 정도 프라모델을 꺼내서 조립을 한다.

그러면 묘하게도 피곤함이 사라진다. 다시 정신이 맑아진다.

그때 책상에 앉아서 그날 공부한 것을 복습하고 잠자리에 든다.


내가 묘한 표정을 짓자,

그 친구는 갑자기 쌓여 있던 박스 중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형도 오늘 가서 한번 해봐요. 진짜 정신이 맑아진다니까."


며칠 후, 정말로 피곤하고 공부가 하기 싫었던 날 저녁,

나는 반신반의하며 그 프라모델을 꺼냈다.

10cm 정도 높이의 로봇이었다.

부품을 떼어내서 설계도에 따라 조립하기만 하면 되었다.


작은 부품들을 손끝으로 집어 올렸다.

설계도를 보며 순서대로 끼워 넣었다.

딱딱 소리를 내며 부품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조립을 끝내고 완성된 로봇을 책상 위에 세워두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 전에 느꼈던 두통과 피곤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낮잠이라도 자고 일어난 것처럼 머리가 맑았다.

아, 이게 그 친구가 말했던 거구나 싶었다.


도대체 왜 그런 건지 곰곰이 생각해봐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봐도

프라모델 조립과 피로회복의 상관관계에 대한 글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왜 그런지는 잘 모른다.


여하튼 그 뒤로 나도 매일 프라모델이나 조립해볼까 했으나,

알고 보니 그것이 생각보다 비쌌다.

당시 내 형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그렇게 그 기억은 점점 잊혀졌다.

책상 한구석에 놓였던 작은 로봇도 언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최근의 일이다.

어느 날 저녁, 업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온종일 서류를 검토하고 사람들을 만나느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있다가, 문득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가 눈에 들어왔다.


귀찮았다. 내일 아침에 해도 되었다.

하지만 그냥 일어나서 수돗물을 틀었다.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릇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스펀지에 세제를 묻혀 문질렀다.

물로 헹궜다. 물기를 닦아냈다.

제자리에 정리했다.

그렇게 반복했다.

그릇, 접시, 컵, 수저. 하나하나 손끝으로 만지고 닦고 정리했다.


설거지가 끝나자 싱크대를 닦았다. 행주를 빨았다. 개수대 주변을 정리했다.

조리대 위를 닦았다.

그렇게 주방 전체를 한 바퀴 돌았다.


20분쯤 지났을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피로감이 사라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피로감이 어딘가로 빠져나간 것 같았다.

행주로 무언가를 닦을 때마다 조금씩 흘러나간 것일까.

머리가 맑아졌고, 몸도 가벼워졌다.


아. 이 느낌.


이십 년 전, 프라모델을 조립하고 나서 느꼈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그 뒤로 나는 가끔 이렇게 한다.

특별히 피곤한 날 저녁이면, 청소를 한다.

설거지를 하거나, 방 바닥을 쓸거나,

책상을 정리하거나. 세탁한 옷을 개어 정리하기도 한다.

처음엔 귀찮다. 하기 싫다.

하지만 시작하고 나면 손이 움직인다. 몸이 움직인다.


그리고 끝나고 나면, 이상하게도 피로가 풀려 있다.


여전히 나는 그 원인을 정확히 모른다.


다만 프라모델 조립과 청소의 공통점을 생각해본다.

양손을 쓴다. 손끝에 집중한다.

머리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움직인다.

반복적인 동작을 한다.

그리고 무언가가 깨끗해지거나 완성된다.


어쩌면 그런 것들이 피로회복에 도움을 주는 게 아닐까.


우리는 하루 종일 머리를 쓴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걱정한다.

그렇게 머릿속이 복잡해지면 피곤해진다.

그런데 손을 움직이는 순간, 생각이 멈춘다.

손끝으로 무언가를 만지고, 닦고, 정리하는 동안에는 오직 그것에만 집중한다.


그게 어쩌면 회복의 비밀인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에게는 머리를 쓰는 시간만큼,

손을 쓰는 시간도 필요한 게 아닐까.

몸을 쓰는 시간도 필요한 게 아닐까.


꼭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좋다.

설거지를 하거나, 방을 쓸거나,

옷을 개거나, 책장을 정리하거나.

손끝으로 무언가를 만지고 움직이는 시간.


그런 시간들이 우리를 회복시킨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온갖 생각들로부터 우리를 구해낸다.


얼마 전, 나는 문득 그때 그 친구가 생각났다.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프라모델을 조립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처럼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회복법을 찾았을까.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면 물어보고 싶다.

그때 건네준 프라모델 한 박스가

이십 년이 지나 내게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

피곤할 때마다 행주를 집어 드는 내 모습을 보면

웃을지, 아니면 고개를 끄덕일지.


그리고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당신이 건넨 작은 선물 하나가,

이십 년이 지나 내게 이런 깨달음을 주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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