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빈땅 Nov 24. 2023

하나하나 배워갑니다

강화도에 밭을 사고는 거의 매주 강화를 찾았습니다. 처음엔 텃밭 가득한 잡초를 제거하는 게 주된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어느덧 밭 정리가 마무리되고 나니 여유가 생겼습니다. 간간이 고기도 구워 먹고, 불멍도 하고, 강화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시골 살이에 대한 로망이 컸던 터라, 이 즐거움이 마냥 계속될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 환상은 생각보다 일찍 깨어졌습니다.


처음 불멍을 하던 날. 어스름이 지는 석양과 불그스름한 하늘을 배경으로 숯불에 구워 먹을 고기를 준비하며 감상에 젖어있던 것도 잠시, 어느새 온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워졌고 피워놓은 불 주변을 제외하면 거의 보이는 게 없었습니다. 주변에 민가가 여럿 있었지만 거리가 있는지라 잘 보이지 않았고, 근처에 가로등도 없었거든요. 순간 오싹하며 무서워졌습니다. 농막에 전기를 설치하고서는 나아졌지만, 그전에는 이런 어두운 환경에서는 살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어느 날은 강화읍내에서 김포와 강화도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너오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강화도를 오가는 길이 주말에 굉장히 많이 막히기 때문에 차가 없는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 시간에 주로 이동을 했었는데, 한 번 호되게 당하고 나니 여기 살면서 크게 아프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제대로 된 종합병원 하나 없으니, 헬기가 아니고서야 골든타임을 놓칠 게 분명했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연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른 아침 강화도로 들어가다 보면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차 안으로도 매캐한 연기가 유입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시골 살이를 동경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맑은 공기일 텐데, 뭘 태우는지 알 수 없는 연기를 어쩔 수 없이 마시게 되니, 시골 생활에 대한 환상이 싹 가셨습니다. 대체 뭘 태우길래 이렇게 안 좋은 냄새가 날까? 이건 뭐 자동차, 공장 매연 저리 가라였었죠. 마을마다 쓰레기 분리수거장이 설치되어 있지만, 연세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종량제 봉투를 사서까지 쓰레기를 버리러 먼 걸음 하실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마당이나 밭에서 그냥 태워버리지... 시골에 살면 건강을 얻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났습니다. 


"농촌은 도시가 커지는 만큼 피폐해졌다. 강준만 교수는 '지방은 내부 식민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농촌은 젊은이와 식량을 도시로 보냈고, 도시는 농촌으로 혐오 시설과 쓰레기를 보냈다."

- 이동호 님의 <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 중에서


그래서 어떡할 거냐고요?


무작정 시골 살이를 동경하기보다, 당분간은 도시에 살며 가끔 근처 텃밭을 찾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기로 하였습니다. 




텃밭에서 수확한 노랑 당근. 밭에 퇴비나 거름을 일절 주지 않아서인지 완전 꼬맹이들이 태어났습니다. 씨만 뿌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나 앙증맞고 귀여운 당근이 저희에게 와주다니! 흙을 씻어내 먹어 보니 크기는 작지만 시원하고 달달한 게 맛은 일품이었습니다.

꼬마 당근

8월 말부터 맨땅에 작물들을 심기 시작했으니 텃밭농사도 어느덧 3개월에 접어들었을 때. 다들 텃밭에서 키운 배추와 무로 김장을 한다고 난리인데, 우리 밭 배추는 느릿느릿 자라 상추만 해 지고는 날이 추워져 성장을 멈춰버렸습니다. 씨앗으로 뿌린 상추는 한 번도 먹어보질 못했고요. 


도시농부학교에서도 텃밭에 퇴비는 뿌려주었으니, 아무것도 주지 않은 땅이 이렇게나 척박한 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도시농부가 되고서는 내 가족을 위한 먹을거리를 직접 생산(?) 하는 만큼 유기농업을 실천하고 싶었습니다. 나아가 지구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일하는 한 사람으로서 주변 환경을 오염시키거나 자연(땅속 생태계 포함)에 해를 끼치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서 인위적인 개입도 가능하면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저의 관심은 자연농법(*6무 농법)으로 이어져, 제대로 아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제 밭에선 6무를 실천하겠노라 마음먹게 되었는데...


*6무 농법은 無제초제, 無경운, 無시판퇴비, 無화학비료, 無비닐, 無병충해방제 등을 실천하는 자연순환농법


기적의 사과를 쓴 기무라 아키노리 님의 <자연재배 놀라운 기술>을 읽어보니, 무농약, 무비료의 친환경 농법을 하기 위해선 그전에 땅심을 기르기 위한 밑 작업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한국보다 양분이 3배나 풍부한 땅임에도 이 분은 100% 자연농법으로 사과를 생산하기 위해 10년에 걸쳐 땅을 만드셨거든요. 


여러 나라 흙의 비료 보유량 (이완주 님의 <흙에서 시작하는 농사과학> 중에서)


지난 3개월간 제가 땅심을 기르기 위해 한 일이라고는 헤어리베치와 호밀을 심은 게 전부였습니다. 헤어리베치는 뿌리혹박테리아가 작물 생장에 필수적인 공기 중의 질소를 고정해 주고, 호밀은 1m까지 뿌리를 내려 무경운 농사를 가능하게 해 준다고 해서 심었는데, 그 이 이상은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야 어느 세월에 땅심을 키울 수 있을까요? 1주일에 1~2번 텃밭을 찾는 보통의 도시농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내년에는 퇴비는 써야겠죠? 그래야 함께 하는 가족들이 수확의 기쁨이라도 제대로 맛볼 수 있을 테니까요.


"자연재배의 기본은 흙의 힘을 최대한 발휘시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과이든 야채나 쌀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무농약, 무비료 재배를 하기로 결심하여 시도하면서 꽃도 피지 않고 열매도 맺지 않는 참혹하고 냉혹한 시련의 시대를 거쳤습니다. 그러나 도토리나무를 훌륭하게 키워낸 산의 환경을 재현하기 위해 힘쓴 결과, 지금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모델은 자연입니다만, 그렇다면 사람 손이 필요 없는 산과 같이 그저 밭을 방치해 두면 될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도토리가 자라는 산은 긴 세월에 걸쳐 자연이 이룩해 놓은 생명이 순환하는 환경으로 필요한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그 결과 만들어진 환경입니다."

- 기무라 아키노리의 <자연재배 놀라운 기술> 중에서




오래간만에 영화 '아바타'를 다시 보고, '잡초'를 생각했습니다.


영화 후반부로 가면 나비족을 공격해 희귀 자원을 탈취하려는 회사를 설득하기 위해 그레이스 박사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미신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숲의 생태학에 대해 말하는 거라고요. 나무들의 뿌리가 전기화학적으로 소통해요. 인간 신경 세포의 시냅시스처럼요. 한 그루는 주변의 1만 그루와 소통하고 판도라엔 총 1조 그루의 나무가 있어요. 인간의 두뇌보다 더 촘촘해요. 알겠어요? 일종의 네트워크라고요. 나비족은 그걸 이용할 수 있어요. 데이터와 메모리를 주고받는다고요." 


하지만 돌아온 것은 물론, 현지 책임자의 '나무면 그냥 나무지, 무슨 개소리냐'는 비아냥뿐이었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연결을 강조하는 동양 사상의 영향을 오랜 기간 받아왔음에도 물질문명에 경도되고 치우쳐진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똑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하지만 놀랍게도 해당 대사는 과학적 근거가 있습니다.


1990년대부터 이를 연구한 분이 바로 수전 시머드(Suzanne Simard)라는 이름의 균류학자인데요. 이 분의 연구에 따르면, 자연계의 모든 나무들은 거대한 균사체 네트워크(Wood Wide Web)로 연결되어 있고 이를 통해 의사소통하며 공동 운명체로서 기능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어린 묘목이 대부분을 이루는 그늘진 곳의 식물들은 도태되는 것이 아니라, 숲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들이 햇빛을 받아 만든 광합성산물을 제공받아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영양분의 재분배는 종 내에서 뿐만 아니라 종 사이에서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거대 균사체 네트워크


그렇다면 잡초는 어떨까요? 


정말 잡초는 양분 경합으로 인해 농작물을 재배하는데 방해만 되는 걸까요? 아니면 잡초와 작물의 공생도 가능한 걸까요? 생각은 많아집니다만 그걸 고민하기에는 눈앞의 상추가 너무 따먹고 싶고, 토마토가 하루라도 빨리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도시농부학교에 다니기 전만 해도 저희 가족은 주말이면 이곳저곳 다니기 바빴습니다. 그런데 도시농부학교를 다니면서 그 횟수가 점차 줄어들더니, 땅을 사고서는 그야말로 강화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가질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회사 생활로 지친 공허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한 행동이 아니었나 싶은데요. 


텃밭에서 일을 하다 보면 몸은 지치고 힘들지만, 정신은 온통 하는 일에만 쏠려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를 잊게 되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됩니다. 머릿속이 완전히 비워지고 '멍'이란 바다에 푹~ 빠져 부유하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뭐라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경험할 수 없는 종류의 것으로 한편으로는 평온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나란 존재 자체가 뻥 뚫린 것 같은 시원한 기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니 마라톤 선수들이 달릴 때 느끼는 *러너스하이(Runner' high)와도 흡사할 것 같습니다. 


*러너스하이는 마라톤과 같이 지속적인 운동(수영, 사이클, 축구 등)을 할 때, 우리 몸 안에서 분비되는 엔도르핀이란 호르몬이 신체적 스트레스와 통증을 억제하며 발생하는 행복감.  


이런 무아지경 상태에 빠지면 몸은 힘든데 멈출 수가 없습니다. 잡초와 한바탕 전쟁을 치를 때의 호미질도, 밭둑에 자생하는 아카시아 나무의 뿌리를 뽑기 위해 사투를 벌일 때도, 7시간 넘게 조립식 창고를 조립할 때도, '언제 이 일을 끝내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몸은 뭔가에 중독된 것처럼 잠깐의 휴식도 잊고 다시금 작업을 이어가게 됩니다. 나를 괴롭히던 부정적인 생각이나 내 머릿속을 휘젓던 잡생각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요. 


이런 행복감 때문에 지금도 주말만 되면 강화도로 발길이 향하나 봅니다.




풀멀칭이니 잡초와의 공생이니 했지만, 여름만 되면 후회가 밀려옵니다. 제 몸 둘 곳 하나 찾을 수 없이 빼곡한 잡초들을 보고 있으면 한숨이 절로 나오거든요. 역시 4평을 관리하던 것과 100평을 관리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텃밭에 도착하자마자 작업 모드로 변신! 낫을 들고 쪼그리고 앉아 조금씩 이동하며 1~2시간 내내 잡초와 씨름을 하고 나면 어느새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됩니다. 주변 경치를 둘러볼 여유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전기 예초기를 하나 장만했습니다. 비닐은 죽어도 쓰기 싫으니, 예초기가 나을 듯했습니다. 


전기 예초기는 처음 사용해 봤는데, 기름 예초기처럼 무겁지도 않고 소음과 냄새도 안 납니다. 배터리 지속시간이 문제 이긴 한데, 저희 같이 작은 땅은 매주 와서 한 번씩 작업해 준다고 생각하면 딱 적당한 듯합니다. 작업하며 흐르는 땀의 양은 전과 비교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이건 뭐 거의 애교 수준이죠. 이렇게 물건 사며 만족해 본 것도 오래간 만입니다. 


전기 예초기


그나저나 일하다 보니 꽤나 많은 개구리, 메뚜기들이 도망가느라 난리입니다. 미안해, 애들아!

이전 03화 100평 짜리 땅을 샀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