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장에서의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어느 날 취업공고를 하나 보게 되었는데, 그 조건이 정말 파격적이었습니다. 새롭게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비영리 국제단체(NGO)의 한국 담당 컨설턴트 자리였는데 재택근무가 기본이었거든요. 당시만 해도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이라 재택근무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파트타임 계약직이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제게는 이 자리가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게다가 앞서 잠시 말씀드렸던 반농반X도 실천해 볼 수가 있으니 지원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2019년 9월부터 2022년 12월까지 제 시간의 절반은 텃밭 생활(도시농부학교와 강화도 농장)에 할애하고, 나머지 절반은 좋아하는 일(환경 분야 국제협력)을 하며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3년 정도 지속된 반농반X 생활은 너무 행복했습니다.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함께 할 수 있었고, 적당한 일을 통해 생활비를 벌면서도 스트레스는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주기적으로 텃밭에 나가 작물을 돌보고 자연과 함께 하니 삶도 보다 풍요로워졌습니다.
다만 이런 제 삶은 지속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저야 반농반X를 하며 삶의 만족도가 높아졌다지만, 아내는 여전히 출퇴근을 반복하는 평범한 직장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제 스트레스가 줄어든 만큼 서로 화내고 다툴 일은 줄어들었지만, 아내의 직장 스트레스는 그대로였습니다.
둘째로 제 계약은 2022년 12월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습니다. 함께 일하던 단체가 한국 사업을 종료하게 된 건데, 일자리를 잃고 나니 하루 아침에 백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음 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코로나19 사태가 끝이 나니 재택근무 형식의 일자리도 거의 사라져서 공백만 점점 길어지고 있습니다.
걱정이 하루하루 쌓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서두르지는 않겠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란 없다. 그날이 그날인 것 같아도 인간은 천천히 어느 지점인가를 향해서 간다. 헛되이 거저 지나가는 시간은 없다.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인 조급증과 욕심 때문에 다만 실감하지 못할 뿐."
- 정희재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중에서
사실 제가 대안적 삶의 방식에 관심을 가지고 시도하게 된 건 제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대학원에서 국제협력을 공부했고, 대학원을 졸업하고서는 줄곧 국제개발협력이나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분야에서 일해왔습니다.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개발도상국들이 경제발전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올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하며 여러 나라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요. 이런 일을 하면서 제가 품게 된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발전이란 무엇일까?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읽으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제 여동생이 레에 살거든요. 여동생은 일을 빨리 하게 만드는 것들은 뭐든지 가지고 있어요. 옷을 가게에서 구하고, 지프를 타고 다니고, 전화기나 가스 요리기도 가지고 있어요. 그런 것들 때문에 시간이 많이 절약될 텐데 제가 찾아갈 때면 저하고 이야기 나눌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답니다."
라다크는 인도의 북동부 히말라야 산악지대에 위치한 지역으로, '레'는 이곳의 중심도시를 말합니다. 라다크는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겨울이 반년 이상 계속되는 척박한 환경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것으로 자급자족하며 행복한 공동체를 일궈온 곳으로 유명한데요. 이곳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 90년대 들어 소위 말하는 '개발', '발전'이 처음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바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 주는 모든 것들을 갖추고도 저 멀리 시골에서 자신을 찾아온 가족과 이야기 나눌 시간조차 갖지 못하게 된 라다크인의 모습,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GDP로 상징되는 경제성장만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한국 경제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그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 경제는 누구를 위한 성장이고 발전인가요?
아시아 최초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야 센은 그의 책 <자유로서의 발전(Development as Freedom)>에서 '발전이란 자유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럼 우리는 점점 더 자유로워지고 있는 것일까요? 오히려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점점 더 구속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래된 미래>란 책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 좋게 이 책의 저자인 헬레나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에서 마련한 강연회 자리였는데, 그 자리에서 헬레나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강연회 중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서 도시와 컴퓨터를 떠나 시골로 이주해 소규모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이 사람들이야 말로 내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다."
반농반X의 한 날개인 반X를 잠시 잃었지만, 지난 3년여간의 시간을 통해 저는, 시골 생활은 어떨지, 실제로 농사를 짓는다는 건 어떤거지 등 귀농귀촌의 기본이 될 것들을 도시에 살면서도 직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시가 아닌 시골에 행복이 있다는 헬레나의 말에도 어느 정도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