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나'는 어디 갔을까

by binter

어느 날 감기에 걸려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았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포장된 약이 한 줄씩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괜스레 뿌듯함을 느꼈다. 일에서 얻는 쾌감보다 큰 것 같았다. 그 순간, 이런 비교를 진지하게 하고 있는 내가 미친 것처럼 느껴졌다. 약을 꾸준히 먹어야 한다는 단순한 목표가 나에게 이런 기쁨을 줄 줄이야. 이건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다.




식당이나 카페 어디를 가도 내가 하는 일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일의 범위와 방법이 명확한 분들이군.
부럽다. 나도 저런 완벽한 시스템 안에 갇혀 있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겠지..?'

아무도 모르겠지. 그저 성실하게 일하고 있을 뿐인데 그 모습을 보고 긁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런저런 비교를 쉴 새 없이 하고 있으니, 정신병에 걸려버릴 것 같다.


내가 하는 일에는 나름의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는 역설적으로 나를 더 무력하게 만들었다.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있는 일이었다면,
매일매일 내가 옳고 그름을 알 수 있었다면
이렇게 번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영향도 덜 받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정답 없고 열려 있는 업무를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들이 가진 명확함이 부러웠다. 그들은 주어진 업무를 성실히 해내며 적절한 보상을 받는 듯 보였다.



예전의 '나'는



그러다 문득,

'어? 예전의 나는 이 불명확함을 명확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는데?
그래서 이 직업이 좋았는데?'

그렇다.
나는 명확한 문제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을 즐겼고, 수많은 데이터로 이루어진 바닷속을 헤엄쳐 다니며 문제 정의를 하고 어떻게 해결할지 설계하는 작업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이다. 심지어 구체적인 지시를 받아도 자꾸만 반박하고 싶고, 나만의 터치를 넣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여느 때와 같이 카페에 눌러앉아 신세 한탄을 하고 있던 나였는데,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회사 밖의 일상까지 깊숙이 침투해 버린 이 검은 기운이 슬슬 짜증 났다. 처음엔 그저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던 내가 점점 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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