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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Oct 11. 2023

새로운 여정을 향해(1/2)

이 글은 2023년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인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의 제1장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마치며 : 새로운 여정을 향해


연휴는 내일까지다. 처음 계획을 세울 때는 남쪽 국경에도 발도장을 찍으려 했었다. 그러나 직장 동료이자 친구인 레나드(Renad)가 마지막 날에는 반드시 자기 집으로 놀러 오라고 신신당부를 한 터라 여정을 헤브론까지로 단축했다. 솔직히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그녀는 회사 일은 물론이고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친절히 가르쳐주는 고마운 스승이었다. 자밥디에서 열린 결혼식에 데려가 준 것도 그녀였다. 답례를 충분히 하지 못해 늘 미안해하던 터에 초대를 거절할 순 없었다.


레나드는 우리 사무소에서 최고참 현지 직원이라 주위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곤 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출장 온 협력기관의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놀라기도 했다. 처음 봤을 때는 그저 미모의 여성이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다며 감탄을 터트리지만, 업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쯤에는 팔레스타인에도 착한 사람이 있다며 감명받는다.


어느 날은 레나드가 없는 자리에서 한국인들끼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레나드 같기만 하면 다들 평화롭게 살 텐데.”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너무 안타까웠다. 팔레스타인인들이 폭력적이라 유대인과 싸운다는 전형적인 편견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몇 번 만나본 적도 없고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적은 더더욱 없으면서 왜 이런 가당치도 않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된 것일까. 모르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은 우리나라로부터 심리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나라 중 하나다. 테러와 안전 문제에 대한 과장된 인식으로 일반 국민들은 팔레스타인에 발걸음을 디뎌보지 못하고 미디어로만 접해왔다. 그런데 기성세대가 접해온 미디어는 친기독교, 친미 성향으로 인해 전통적으로 친이스라엘 일색이었고 역사적 사실을 전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의 개발 신화와 군사적 성공만을 선전했다.


여기에 길들여진 한국인들은 팔레스타인을 찾아와 눈으로 보더라도 선입견에 사로잡혀 헤어 나오질 못한다. 서안지구에서 황무지를 보게 되면 팔레스타인인들이 게을러서 그런 거라며 비난하고 이스라엘의 경제 수도라 불리는 텔아비브와 같은 번창한 도시를 보면 사막에서 꽃을 피웠다고 칭송한다. 팔레스타인의 황무지가 C 지역이라 개발이 금지되고 물을 끌어다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고, 텔아비브는 사막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모르기 때문이다.(1)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해도 그들이 유대인을 먼저 공격했기 때문에 정당화된다고 주장하는 한국인도 여럿 보았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왜 ‘테러’를 하는지는 조금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이스라엘군과 경찰, 정착민들이 팔레스타인인들보다 먼저, 지속해서, 더 심각한 인명피해를 일으키는 테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고 설령 가르쳐줘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테러는 잘못된 거잖아요.”라는 말에 “그럼 팔레스타인인들을 먼저 억압하고 죽인 이스라엘인들의 행동은요?”라고 되물으면 불만에 찬 표정을 지으며 그저 침묵할 뿐이다. 정치적 혹은 종교적 선입견에 가득 차 옳고 그름을 머릿속에 이미 정해놓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필자가 KOICA 팔레스타인 사무소에서 마지막으로 일한 2015년 7월 31일에 나블루스주의 두마(Duma) 마을에서는 복면을 쓴 정착민들이 가정집에 화염 폭탄을 던져 18개월 된 아이와 부모를 살해했다.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총리조차도 테러라고 규탄한 이 사건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위는 빈번해졌다.


몇 주 뒤에는 헤브론 도심지에서 이스라엘군이 대학생 한 명을 체포했다. 이스라엘군은 당시 이 학생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온라인에 올라온 영상에서는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어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급기야 10월에는 분노의 달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저항운동을 거국적으로 일으키자는 운동이 일었다. 일부는 과감히 무장투쟁을 선택해 나이프를 들고 이스라엘 군인이나 정착민들을 기습 공격했다.


소요가 발생한 2015년 10월부터 2016년 3월 사이에 팔레스타인인들은 26명의 이스라엘인을 살해하고 241명을 부상 입혔다. 이들은 그저 폭력적이라서 이런 ‘테러’를 감행한 것일까? 하지만 같은 기간 동안 204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군에게 살해당했고 그중 130명이 공격을 시도하던 중에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목숨을 불사하면서까지 하는 행동을 단순히 폭력적 성향이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14,324명의 팔레스타인인이 다쳤는데 대다수는 폭력 행위 없이 시위에 참여했을 뿐이다.(2)


너무나 당연한 소리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인간이다. 그들이라고 좋아서 무장투쟁이나 시위를 벌이는 게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를 억누르는 식민 지배를 끝내기 위해 절박하게 저항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를 거부하는 이스라엘을 평화협상 테이블에 끌어다 앉힌 것도 팔레스타인인들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1967년 이전의 국경선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거부하고 팔레스타인 국토 안에 있는 자원 등을 이용할 온전한 주권도, 난민들의 귀환도 그 어느 것도 용납지 않았다.


오히려 협상이 시작된 이후에도 정착촌을 꾸준히 확장하고 통제와 약탈, 억압을 강화했다. 평화협상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요구한 조건들은 1948년이나 1967년 이래 유엔에서 합법적이고 정당한 권리라고 수십 번도 넘게 결의한 것들이지만 국제 사회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힘을 실어 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20년이 넘게 흐른 오늘날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이 평화적인 해결책에 조금이라도 기대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과반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아직도 그러하다. 팔레스타인 정책설문연구센터(Palestinian Center for Policy and Survey Research, PSR)가 2015-16년 동안 1만여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8차례의 분기별 설문 조사에서 “이스라엘과 병행하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건국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55%는 협상(30.2%)이나 비폭력 대중저항 운동(24.8%)으로 응답했다. 무장투쟁은 39.5%에 그쳤다.(3)


만약 “평화협상이 중지”되더라도 비폭력 운동을 선택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도 63.0%가 찬성하고 35.9%가 반대했고, 무장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그보다 조금 적은 53.1%가 찬성하고 45.6%가 반대했다. [약 10%는 비폭력 운동과 무장투쟁을 병행해야 한다고 응답한 것을 알 수 있다.]


백 년이 넘는 분쟁과 반세기가 넘게 계속된 점령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이 ‘얼마나’ 지치고 괴로워하는지를 안다면 이러한 응답은 정말로 놀랍게 느껴질 것이다. 1장에서 다룬 점령지의 실태는 안타깝게도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저 악랄한 식민 지배의 윤곽을 엿볼 수 있도록 대표적인 유형만을 소개했을 뿐이다.


여행기에 포함할 수 없었던 가자지구의 상황은 더한층 열악하다. 2007년부터 계속된 완전 봉쇄는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교전이나 전쟁보다도 절대 덜하지 않은 고통을 주고 있다. 전쟁으로 파괴된 집을 수리할 건축자재를 들여오지 못하고, 신생아가 추위에 얼어 죽는데도 발전소를 고칠 부품을 들여올 수 없고, 전기를 생산할 석유도 충분히 수입할 수 없고, 마실 물이 부족해 주민들이 해수가 섞여 들어간 지하수를 식수로 쓰고 있는 상황에도 담수 시설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전력을 생산할 수가 없다.(4)


필자는 2014년 전쟁이 끝나고 반년이 조금 더 지난 이듬해 3월에 가자지구로 출장을 왔는데 그때까지도 복구되지 못한 모스크와 집들을 볼 수 있었다. 숙박한 5성 호텔에서는 양치할 때 물에서 소금 맛이 확 느껴졌고 샤워를 한 후에는 피부가 따끔거렸다. 물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피부로 깨달았다. 그런데 동행한 가자지구 보건부 직원에게 주민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게 뭐냐고 물으니 의외로 석유라는 대답을 들었다. 전력이 공급되는 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일상을 조정할 정도로 전력난은 위태로웠다.     


누군가를 정말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만나게 되었을 때 기분이 어떤지 아세요? 하루 종일 함께 있고 싶고, 조금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고 함께 하는 시간을 즐기고 싶죠. 그게 바로 전기와 제 관계에요. 8시간 동안 들어오고 8시간 동안 끊기는 게 가자에서 전기가 공급되는 방식이에요. 이렇게라도 전기를 쓸 수 있는 건 축복이에요. 2014년에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 이후부터 3개월 넘게는 하루에 4시간만 전기가 들어왔거든요.

모든 게 이 소중한 시간 동안 작동돼야 해요. 세탁기, TV, 컴퓨터, 노트북과 휴대폰 충전, 그리고 물 펌프도요! 전기가 들어오면 그때가 몇 시든 간에 모두가 자다가도 일어나요. 마치 신성한 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자정에 여자들이 빨래하고 학생들이 공부해요. 샤워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물도 전기가 작동해야 들어오는 거니까요. 때로는 손빨래를 해야만 해요. (세탁기를 돌리기엔) 전기 공급량이 부족하거나 공급되는 시간이 짧을지도 모르니까요.

전 전기가 부족한 게 문제는 아니라고 혼잣말해요. 사실 전기가 없을 때 일을 자주 해요. 손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요. 그러나 전기가 정말 그리워지는 때도 있어요. 얼어붙을 것 같은 날씨에도 난로를 틀지 못하고, 아이들은 화장실을 혼자 가는 걸 무서워하고, 신생아가 추위에 얼어 죽고, 사람들이 촛불을 켜고 잠들었다가 눈을 뜨면 화상을 입은 채 병원에서 일어나게 되는 겨울에 말이에요. 이것만 제외하면 저는 전기가 없어도 문제가 없다고 말해요.

- 『This Week In Palestine』의 기고문에서 발췌(5)


이처럼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인한 팔레스타인의 피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수치화할 수 있는 경제적 피해만 계산하더라도 그 규모가 엄청나다. 2014년에 국제 사회는 팔레스타인에 24.9억 달러의 원조를 지원했으나, 예루살렘 응용연구기관(the Applied Research Institute - Jerusalem, ARIJ)은 같은 해에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총 94.6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고 그중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27.6억 달러로 측정했다. 이는 같은 해 GDP 127.2억 달러의 74.4%에 해당한다.(6)


한편, 유엔무역개발협의회는 상기의 조사가 점령으로 인한 ‘일부 제약’의 ‘직접적 비용’만을 계산한 한계를 지적하며 점령이 없다면 GDP의 2배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유엔무역개발협의회는 이렇게 “점령의 경제적 비용을 측정하는 것이 점령에 대한 가격표를 붙이거나 점령을 끝내는 대신 지불할 보상금을 설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더구나 ... 생명과 공동체, 문화, 주거지, 고향의 손실과 파괴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어떠한 금전적인 가치로도 매길 수 없다.”라고 일깨운다.(7)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제도를 가진 이스라엘이 어째서 이렇게 비인도적이고 구태 악습의 정점인 식민 지배를 하는 것일까? 유대인들이 사악한 인종이라서 그런 것일까? 앞서 두마 마을에 불을 질러 3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한 정착민의 테러에도 나름의 명분은 있었다. 한 달 전 도로에서 신원불상자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은 어느 유대인에 대한 보복이었다.


당시 사망한 유대인의 어머니는 테러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이건 내 아들에 대한 추억과 아들이 살아온 방식에 대한 모욕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관련이 없고 이런 식으로 연관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모든 정착민이 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라났습니다.” 이 인터뷰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그녀가 지극히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종단여행을 떠나기 한 달 전에 제닌 근처에서 정착민에게 차를 얻어 탄 적이 있는데 그 역시도 겉보기에는 어느 나라의 어느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식민 정책의 첨단에 서 있는 그들이 이렇게 ‘평범’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의 현실을 제대로 모를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분쟁의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들이 배우고 믿고 있는 역사관에서는 그러했다.


1) 이스라엘 국토에서 과거에 사막이었던 곳은 남부 네게브(Negev)이며 이곳은 지금도 대부분 사막으로 남아 있다. 이스라엘 농업농촌개발부에 따르면 네게브 지구의 약 14%가 농지로 이용되고 있다.

2) UNOCHA, “Data on casualties”

3) PSR, Public Opinion Poll No. 55-62 (2015.1Q-2016.4Q).

4) UNOCHA, The Humanitarian Impact Of Gaza’s Electricity And Fuel Crisis, July 6, 2015;

5) Enas Fares Gannam, "Coping with Absence," This week in Palestine, issue 213.

6) ARIJ, The Economic Cost of the Israeli occupation Report, 2015; PCBS, “National Accounts.”

7) UNCTAD, Report on UNCTAD assistance to the Palestinian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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