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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Oct 11. 2023

공존의 도시에서 분쟁의 도시로

이 글은 2023년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인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의 제1장에서 발췌하였습니다.


3.5. 공존의 도시에서 분쟁의 도시로     


역시나 이번에도 소나기였다. 헤브론 초입 부분을 지날 무렵에 비는 그쳤다. 차에서 내리면 또다시 비가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오기가 생겨서 내렸다. 걷다가 비가 오면 아무 식당에라도 들어가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거리는 텅텅 비어 있어 걷기 좋았다. 다들 비를 피해 집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우산을 거의 쓰지 않기 때문에 비가 오면 실내에 있거나 차량으로만 이동한다. 그렇다곤 해도 동예루살렘 다음으로 가장 큰 도시인 헤브론에서 이 정도로 한적한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도로 위를 가득 채운 차들이 없었다면 영락없는 유령 도시의 느낌이 날 뻔했다.


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헤브론에는 정말로 “유령 도시”(Ghost town)라고 불리는 구역이 있긴 하다. 다름 아닌 헤브론의 심장부인 구시가지다. 이스라엘의 점령이 시작된 1967년 당시에 구시가지에는 7,500명이 살고 있었으나 1996년에는 고작 400명밖에 살지 않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각종 규제로 개발을 막는 한편, 구시가지 내외부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정착민들이 주민을 공격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1)


구시가지가 집중적으로 탄압받는 이유는 이곳에 유대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Abraham)과 가족의 묘지가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족장들의 무덤(Tomb of the Patriarchs)’으로 부르지만, 유대교에서는 ‘막벨라 동굴(Cave of Machpelah)’[두 개의 무덤 또는 두 개의 동굴이란 뜻이다.]이라 부르고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한 성지로 기린다.


한편, 무슬림들도 아브라함(아랍어로는 이브라힘)을 선지자이자 아랍 민족의 조상으로 믿기 때문에 지하 묘지 바로 위에 ‘이브라힘 모스크(Ibrahimi Mosque)’를 세웠고 팔레스타인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이슬람의 4번째 성지로 기려진다.


오늘날 이브라힘 모스크는 무슬림과 유대인이 이용하는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이런 모습은 안타깝게도 평화로운 공존이 아니라 탄압의 결과다. 오슬로 평화협상이 시작되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있던 1994년 2월에 헤브론 인근의 정착민 바루치 골드스타인(Baruch Goldstein)은 이브라힘 모스크에 돌입해 기도 중이던 29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125명을 부상 입혔다. 그는 평화협상에 반대하는 유대 단체 소속이었다.


테러 직후 헤브론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위가 일어났고 이스라엘군은 이를 잔인하게 진압해 30여 명을 죽이고 백여 명이 넘는 부상자를 만들었다. 이브라힘 모스크는 폐쇄되었고 9개월 뒤 다시 개방되었을 때는 일부가 유대인들의 기도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런 선례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모스크도 철거하거나 분할시킬지 모른다고 크게 우려하게 되었다. 1996년에는 이스라엘이 성전산/하람 지하에서 터널 공사를 하는 것을 막으려고 시위를 벌이다 70명이 학살당했다.


사진. 이브라힘 모스크 앞에 걸린 이스라엘 국기. 오늘날에도 모스크의 일부가 여전히 유대인들의 시나고그로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 무덤이 위치한 모스크 공간(즉, 분리당하지 않은 부분)에서 유대인들이 기도를 드리기 위해 때때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접근을 강제로 막는다.


평화협상이 진전되면서 1997년에 헤브론의 80% 지역(H1)은 팔레스타인 정부에 이양되었다. 그러나 구시가지를 포함한 나머지 20% 지역(H2)은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의 관할 지역으로 남아 5개의 정착촌이 존재한다. 이스라엘은 정착촌의 안전을 위해 도시 내부에 약 95곳의 통행을 제한하고 있고 그중 19군데에는 정기검문소를 세웠다. 이브라힘 모스크 입구에 설치된 검문소도 있어서 무슬림들이 기도드리는 것을 방해한다.(3)


구시가지의 팔레스타인 주민을 추방하기 위한 억압 정책도 계속되었다. 검문소로 사람들의 이동과 생필품의 반입을 통제하고, 구급차와 소방차 진입을 지연시켜 인명피해를 만들고, 상점을 강제로 폐쇄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정착민이 주민들을 조직적으로 공격하는 모습을 보고도 가만히 있고 때로는 군경이 직접 나서서 주민들을 폭행하고 학대한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팔레스타인인들은 구시가지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인구가 유입되어 2015년 현재 약 6,500명의 주민이 구시가지에서 살고 있다.(4)


1967년의 점령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의 억압을 피해 도망치거나 복종하는 대신 고향에 남아서 인내하는 투쟁법을 택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를 수무드(sumud)라 부른다. 언론은 무장투쟁을 저항운동의 핵심이나 심지어 전부인 양 보도하지만 “존재하는 것이 저항하는 것”이라는 수무드야말로 팔레스타인에서 사는 모두가 가장 중히 여기는 정신이며 전 국민이 지금 현재도 실천 중인 운동이다.(5)


무장투쟁이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하거나 점령 정책을 강화할 수 있는 ‘정당성’을 제공하는 것과는 달리 수무드는 일말의 구실도 주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역경에 빠트린다. 이스라엘은 수무드를 실천하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해외로 이주하도록 자유를 억압하고 생활환경을 극도로 열악하게 만들지만, 이는 수많은 인권단체의 극심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국제앰네스티(International Amnesty)는 해마다 이스라엘을 반인권 국가로 등재하고 있다. 2016년에는 이동과 표현, 집회결사의 자유 억압, 강제추방과 철거와 같은 주거권 침해, 고문, 학대, 임의적 체포와 구금, 경찰과 군인의 위법한 살인과 처형, 과도한 폭력, 정착민의 폭력, 여성에 대한 폭력, 전쟁범죄자에 대한 무처벌을 인권위반 행위로 지적했다.(6)


택시에서 내린 뒤 30분을 걷다 보니 시내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비가 오지 않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식당으로, 카페로, 쇼핑센터로 저마다 바쁘게 옮기는 발걸음이 도시에 다시 활력을 불어놓고 있었다. 보통 경제적으로 발전된 도시일수록 라말라처럼 개방적이고 세속적이고 익명성이 강하지만, 헤브론은 도리어 종교적이며 보수적인 곳으로 유명하다. 거리의 여성들은 거의 예외 없이 히잡을 쓰고 있고 주민들은 이웃과 더불어 사는 문화를 지키고 있다.


사진. 헤브론 도시 전경. 팔레스타인에서 동예루살렘 다음가는 대도시다.



모텔에 들어와 체크인을 하고 저녁을 먹으러 구시가지로 나왔다. 많이 위축되었다지만 여전히 재래시장이 있고 사람들로 분주했다. 그러나 문을 걸어 잠근 건물들도 눈에 띈다. 폐쇄된 일부 건물의 2층에는 정착민들이 들어와 살고 있고 창문에서 행인들에게 오물을 던진다.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물망을 치고 팔레스타인 정부가 쓰레기를 주기적으로 수거하고 있으나, 액체 물질 투기나 악취로 인해 여전히 주민들이 고통과 불편을 호소한다.


사진 20. 구시가지에 쳐진 그물망과 정착민이 투기한 쓰레기


과거에는 재래시장의 중심지가 슈하다(Shuhada)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2차 인티파다 때 정착민을 대상으로 한 폭탄테러가 연달아 발생한 후로 군사통제지역으로 설정되었고 10년이 넘은 지금도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오직 거주민과 외국인에게만 통행이 허락된다.(7)


예전에 한 번 들어가 본 적이 있는데 검문소를 통과해 들어온 건데도 한 골목을 지나는 중에 3차례나 가방을 풀어헤쳐야 했다. 이렇게 거리를 막고 검문검색을 강화한다고 팔레스타인인들의 공격이 멈출 리 없다는 것을 알기에 너무나도 무의미해 보였다. 정착촌을 짓기 위해 땅을 빼앗고 정착민들의 테러가 계속되는 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보복은 당연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침대에 몸을 눕히며 여행을 무사히 끝마쳤다는 안도감을 만끽했다. 그동안 도시 내에서 여행할 때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을 봐서 뿌듯하고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그래도 계획대로 도보 여행만으로 끝내지 못한 게 미련이 남았다. 검문소나 고속도로는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기후마저 방해한 것은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업 국가에서 그렇듯이 팔레스타인에서도 옛날에는 비가 축복으로 여겨졌다. 비와 함께 여정을 마무리한 것은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축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 한 달 동안이나 비가 안 오는 것을 보며 억울했던 후일담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1) Badil, Forced Population Transfer; B’Tselem, Ghost Town.

2) UNOCHA, Humanitarian Bulletin occupied Palestinian territory; Badil, Forced Population Transfer.

3) Ibid; UNOCHA, Humanitarian Impact On Palestinians; B’tselem, Ghost Town; Badil, Forced Population Transfer: Hebron;

4) Jamal R. Nassar and Roger Heacock, Intifada: Palestine at the crossroads; Badil, Forced Population Transfer: Hebron.

5) Amnesty, Amnesty International Report 2015/16: The State of the World's Human Rights, February 2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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