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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식한잔 Jul 31. 2020

What is it like to be a bat

의식에 대한 사고 실험 2탄

매리의 방 사고 실험에 이은 의식에 대한 사고 실험 2탄 Thomas Nagel의 What is it like to be a bat입니다. 


이 논문에서 Nagel은 Mind-body probelm 즉 어떻게 순수한 물질에서 의식이라는 전혀 비 물질적인 형질이 발현되는가에 대한 문제를 풀고자 합니다. 이 문제는 의식(Consciousness)이라는 특징 때문에 흥미롭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의식 이란 그 고유의 특징상 물질적으로 구분될 수 없고, 그 말은, 비 물질적인 어떠한 형질이 물질들로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이와 같은 현상을 emergent phenomenon이라고 부르는데, 그 예시 중 하나가 물입니다. 물은 물이기 때문에 물으로서 가질 수 있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축축함, 전도성, 표면장력 등등..) 하지만 물분자 하나를 보면 혹은 물 분자 몇 개를 본다면 거기에는 물의 특성 중 어느 특성도 존재하지 않죠. 물의 특성은 물 분자 여러 개가 뭉칠 때 발현하는 패턴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패턴 혹은 형질을 발현 형질 혹은 emergent phenomenon이라고 부죠. 우리의 의식도 발현 형질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접근방법이 Nagel이 논문을 쓸 당시 팽배했는데, 바로 Reductionism(환원주의)입니다. Reductionism은 아주 강한 물리학적 접근법 중 하나인데, 모든 물질은 elementary particle(기본 원소), 현재 밝혀진 연구에 의하면 boson과 fermion, 그리고 그 물질들을 결합하는 4가지의 힘 약한 핵력, 강한 핵력, 전자기력, 중력으로만 구성된다는 아주 강한 이론입니다.


이론물리학의 전성기였던 1900년대 초중반, 만은 이론물리학자들은 Reductionist(환원 주의자)였고, Reductionism은 의식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물리학자들은 의식을 등한시하거나 연구의 관심을 받을만하지 못한 주제라고 치부하였고, 이는 많은 철학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반발들 중 하나가 바로 이 논문의 포인트이죠.


자, 다시 한번 의식이라는 재미있는 친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의식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의식에 관한 어떠한 과학적인 증거가 없습니다 (현시점 가장 유력한 증거로 여겨지는 뇌과학적인 이론 Integrated Information Theory, IIT, 가 있지만 이는 다음에 집중적으로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식이란 범 지구적 혹은 범 우주적 현상으로 많은 동물들이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의식의 존재 유무가 어떠한 생명체까지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논문에서 저자가 만드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아주 강력한 포인트는, 만약에 ‘어떠한 것으로 존재하는 것 같음’ 이 있다면 그 ‘것’은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예시를 들어보면, ‘책상’으로써 존재하는 ‘느낌’ 이 있을 것 같은가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책상으로서 존재한다는 의식적인 경험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해면동물’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스펀지로써 존재한다는 ‘느낌’ 이 있을 것 같은가요? 만약에 그 ‘느낌’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면, 스펀지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뇌과학자로서, 이러한 주장은 쉽게 논란을 만들 수 있는 주장이나, 철학적 논점으로 봤을 때는 충분히 흥미로운 주장이므로, 뇌과학적인 주장은 뇌과학을 본격적으로 다룰 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논문에서 Nagel은 Qualia를 정의하지는 않지만 이를 '경험의 주관적인 특성'이라고 길게 풀어 설명합니다. 전편에 다룬 것처럼 Qualia는 우리의 개개인의 상당히 주관적인 경험의 특성인데요, 예를 들어서 커피를 마실 때의 경험 (커피의 은은한 향, 그것이 일으키는 냄새로서의 기억, 그리고 그 시간과 장소의 특성상 일으키는 기억과 생각,  커피의 맛과 카페인의 신체 도입으로 인한 의식의 변화를 포함한 너무나도 많은 사람마다 달라지는 '주관적인' 경험들), 운동을 하는 경험, 걷는 경험, 이러한 모든 경험들은 그 각각 제각기 다른 특징들을 갖고 있으며, Qualia는 이러한 특성들을 일컫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이 ‘경험의 주관적 특성’(Qualia)은 Nagel이 논문을 쓸 당시,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인, 의식을 환원주의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좀비 논의 가 도입됩니다.


Zombie Argument(좀비 논의)는 아주 흥미로운 argument(논의)인데, 그 이유는 이 논의가 던지는 의식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인지합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가끔 그 생각을 생각하기도 하죠 (meta-thinking:생각에 대한 생각) 그리고 이러한 meta-thinking 은 바로 내가 의식을 갖고 있나?라는 질문에 사용될 수 있고,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의식 유/무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의 의식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쉽게 말해서 상대방의 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의식을 믿어주는 방법밖에 없죠. 여기서 시작하는 게 좀비 논의입니다. 이 논의에서 사용되는 좀비는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좀비와는 사뭇 다릅니다. 이 좀비는 모든 행동을 사람같이 하지만, 주관적인 경험(Qualia)이 없는 형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좀비 그리고 그로부터 발원하는 문제들은 환원적인 접근법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환원적인 접근법 자체가 의식의 존재를 의식 자체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행동, 물질적인 발현에 의해서 의식을 해석하기 때문이죠. 


여기서 재미있는 현대 AI 문제로의 간단한 철학적인 접근법이 있습니다.

Turing-machine이라고 들어 보았나요? 이 machine은 간단하게 설명해서 사람과 대화할 때 사람이 로봇이라고 인식할 수 없는 machine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version의 튜링 머신들이 존재하고, 이 튜링 머신이 기본적으로 담고 있는 철학적인 의미는 좀비 논의에서 나오는 인간 의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튜링 머신은 우리랑 똑같이 대화하면서 우리가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Qualia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 이 얘기는 다음에 AI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해보도록 하죠.


결국 의식에 대한 질문은 주관성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에 대한 많은 답변들이 불가능하죠, 왜냐하면 대부분의 이러한 질문에 대한 과학적인 답변은 제삼자의 입장에서 이루어지고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주관성을 다룰 수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위의 말은 의식이 완벽하게 주관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슬슬 철학의 기본적인 특징이 말꼬리 물기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질문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까지 들어가야만 철학의 본질적인 질문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저와 함께 조금만 더 가보시죠!). 이러한 주관적으로 다른 여러 가지 의식들에서도 공유되는 몇몇 가지의 형질 패턴들이 있고 우리는 그러한 형질들은 객관적으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경학적 요인 때문에 태생적으로 시각이나 청각을 잃은 사람들은 지팡이를 이용함으로써 주변에 존재하는 물체와 자신의 거리를 재고 그로 인하여 환경 속에서 이동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방식은 박쥐의 경험과 겹치는 몇 가지 특성들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이해를 용인할 수 도 있도 있습니다. 즉, 의식은 완벽하게 주관적인 주체이지만, 상대방의 주관적인 경험의 특성과 나의 주관적인 경험의 특성에 겹치는 부분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특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이해를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거울 뉴런 혹은 거울 체계라는 뇌의 영역이 저희에게 가능하게 해주는 아주 유용한 기능인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도 뇌과학을 다룰 때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자세하게 문제를 고찰해본다면 몇 가지 상당히 어려운 질문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첫 번째로, 박쥐는 Sonar(초음파)를 이용해서 환경을 ‘봅니다’. 여기서 ‘본다’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그 중요성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신경’과 ‘시각세포’를 이용해서 ‘보기’때문에, 우리는 박쥐의 시각적 감각을 상상조차 할 수 없죠. 고로 우리는 박쥐로서 존재하는 ‘느낌’ 자체를 이해하는데 문제를 직면하게 됩니다. 


박쥐가 된다는 게 그리고 박쥐로서 살아가는 게 어떠한 느낌인지 ‘상상’ 하는 것에 있어서의 제약은, 우리의 상상력이 우리가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점이죠. 우리는 박쥐 ‘처럼’ 행동한다는 게 ‘나’에게 있어서 어떤 느낌인지 ‘상상’할 수 있지만, 박쥐가 된다는 게 어떠한 느낌일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박쥐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여기서 다루고 있는 본질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질문은 ‘박쥐’로서 존재한다는 게 어떠한 느낌이냐 하는 것이죠.


그러면 공상과학적 접근법으로 어떠한 미래의 첨단과학기술을 이용해서 나의 신체구조와 신경학적 구조를 박쥐의 그것과 유사하게 바꾸어서 내가 그러한 느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어떠할까요? 이러한 접근법은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뇌과학자인 L. A. Paul 이 쓴 Transformative Experience 가 아주 잘 담고 있으니 한번 읽어 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핵심 이론을 간략하게, 현재의 박쥐 이론을 병합해서 설명해보면: 위의 글에서 말한 대로 점진적 혹은 극단적인 어떠한 방법을 이용해서 내가 박쥐가 된다 한들, 그전에 ‘나’라는 몸과 정신을 구성했던 형태에서의 ‘나’는 박쥐로써 존재하는 ‘느낌’에 어떠한 접근법도 없고, 오롯이 ‘내’가 완벽하게 ‘박쥐’가 되고 난 이후에서야 ‘박쥐’로서의 느낌이 어떠한 줄 알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박쥐로써의 느낌이 어떠한지 알 수 없고, 이미 ‘박쥐’가 된 후에는 그 경험은 너무나 당연하고, 나는 이미 ‘박쥐’이기 때문에 ‘나’로써 존재했던 느낌이 어떠한 줄 알 수 없죠. 그 말인즉슨, 박쥐로써 존재하는 게 어떠한지에 대한 ‘사실’은 오롯이 박쥐로부터만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박쥐로서 존재하는 게 어떠한 ‘느낌’ 인지를 이해하는 기술적인 방법은 달성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롯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박쥐로서 존재하는 게 어떠한 느낌일지 아주 대략적인 상상해보는 것이죠.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떠한 생명체로써 존재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다면, 그 생명체의 구조와 행동에 기반하여 그러한 행동들을 보일 만한 일반적인 형태의 '경험'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자세하게 설명해서, 우리는 박쥐가 Sonar를 기반으로 지각한다는 것을 알 고 있으며, 여기서 연역적 접근을 통해서 박쥐는 어떠한 3차원적인 지각을 할 거라고 추측할 수 있고, 만약에 우리가 박쥐가 사냥을 하는 것을 보고 있다면 배고픔이라는 감각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주관적인 경험들 또한 박쥐이기 때문에 기인하는 박쥐만의 주관적인 감각적 특성을 갖고 있을 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느끼는 배고픔이라는 감각은 쉽게 느껴지는 감정 혹은 감각이지만 배고픔이라는 순수 느낌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당연히 박쥐가 느끼는 배고픔이라는 감각은 사람의 것과 다르겠죠). 그리고 이러한 박쥐적 주관적 감각은 우리에게 전무후무합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특성에서 기인하는 주관적인 경험의 차이점들은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태생적 시각적 청각적 차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지각적 경험은 우리와 유의미하게 다를 것이고, 우리는 그러한 경험이 어떠한 것인지 상상할 수 없고 그들 또한 시각적 청각적 차이를 갖고 있는 우리의 경험이 어떠한 것인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만의 특정적인 언어와 경험을 이용해서 박쥐의 느낌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박쥐에게 박쥐만의 박쥐에게 특정적인 박쥐스러운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반박할 수 없다. 


결국, 박쥐와 우리, 그리고 이글의 결론은 무엇일까요?

논문을 끝까지 읽는 내내 저 또한 꼬리의 꼬리를 놓지 않고 논지의 흐름을 좇아가느라 힘들었는데요, Nagel이 이 논문을 씀으로써 주장하고자 했던 것은, 그 당시의 살짝은 오만했던 그리고 원대한 꿈을 꾸었던 이론물리학자들에게의 충고입니다. 우리는 이 글에서 만에도 힘들게 느꼈듯이, 우리가 깊게 생각만 한다면, 무엇인 '주관적'인지 무엇이 '객관적'인지 조차 알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논문이 발간된 지 40년도 훌쩍 지난 현재까지, 컴퓨터가 무엇인지 알기 시작하던 시점부터 손바닥에 휴대폰을 갖고 다닐 만큼 컴퓨터공학과 물리학이 발달할 만큼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가 이 글을 시작할 때 언급했던 mind-body problem은 아기의 걸음마만큼의, 혹은 그보다도 조금의, 발전을 했습니다.


우리가 인간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고, 더 본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우리의 의식에 대한 연구가 조금은 더 관심을 받아야겠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더욱 재미있는 이야기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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