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비슷한 환경과 건물들, 그리고 친절한 사람들, 어딜 가든지 한국어 메뉴판이 잘 되어 있어 일본어를 잘 몰라도 여행하는 데 큰 불편함이 없고, 1~2시간이면 갈 수 있는 접근성까지.
고등학교 시절에 제2외국어가 일본어 이긴 했으나, 아주 먼 옛날이야기이기도 하고 그건 어디까지 프랑스어나 독어가 아니고 일본어였더랬지. 하는 기억 정도일 뿐.
히라가나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 나였다.
히라가나도 기억 못 하는 주제에 용감하게 일본어를 배워봐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이러하다.
5년 전 경계성 종양으로 수술 후 주기적으로 추적 검사를 하며 사는 몸이 되었는데, 2년 전 재발을 했고 재수술을 받게 되었다. 두 번 다 개복 수술이었다. 그리고 24년 6월 수술 부위가 또 재발했다. 더 이상의 개복이 의미가 없다는 판단하에 신장췌이식과의 담당 교수님은 나를 종양내과로 보냈다.
바뀐 종양내과의 교수님은 어쩌면 이제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수술을 반복하는 것보다는 약물을 써보는 방향을 제안하셨다.
나는 그렇게 전보다 더 자주 주기적인CT 촬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당장 죽을 병은 아니다. 골골 팔십이라고 이렇게 병원을 들락거리면서 누구보다 오래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 경계성이 악성으로 바뀔지도 모르고, 이 녀석은 소멸하지 않고 평생 나를 괴롭힐 것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조마조마하며 살아야 할까? 순간 회의감이 몰려왔다.
첫 번째 수술을 계기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서점과 박물관, 도서관 등에서 그림 전시를 해보고, 공모전에 당선되어서 책도 발간해 보고, 사람들 앞에서 나서면 얼굴부터 빨개지는 내가 북토크라는 것도 해보았다.
두 번째 수술 때에는 내 마음과 물건을 비우고 내려놓기가 무엇인지 깨닫는 시간을 가졌다. (물론 다시 맥시멈리스트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그리고 세 번째 재발.
현재 수술을 할지 약물을 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꾸준히 추적 검사를 하며 지켜보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며칠 전 CT 촬영을 했고 다음 주 결과를 들으러 가야 하는 상황이다) 나의 병은 음식을 조절하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다고 했다. 역시나 평소 살던 대로 살면 된다는 이야기만 듣고 나왔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현재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앞선 두 번의 수술에서 이미 알고 있었다.
5년을 살수도 50년을 더 살 수도 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유한한 삶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지금을 잘 사는 것뿐.
그때 든 생각이 바로 이왕 이렇게 된 거 외국어 하나는 제대로 해보자는 것이었다.
자막 없이 영화를 보고 노래를 듣고, 여행을 가서 현지어로 주문을 해보자. 스몰토크도 할 정도면 더 좋겠다.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가장 가능성 있는 접근성 좋은 해외 여행지는 일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