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차차 육아 육아 #8
둘째가 밥을 두고 깨작거린다. 몇 숟갈 먹다 말고 헛구역질을 하더니 급기야 수저를 놓고 다른 장난을 시작한다. 화가 나서 아이를 꾸짖는다.
“너 이렇게 먹을 거면 먹지 말라고 했지?!”
아이는 금세 울먹인다. 언제나 반복되는 일들이다.
“이번에는 뭐가 마음에 안 들어?”
“버섯 느낌이 나는 게 있어.”
그런 식의 물컹거리는 식감을 혐오하는 터라 조리할 때 그런 식재료는 신경 써 제외한다. 역시나 이 식탁엔 그 비슷한 것도 없다. 대체 뭘까. 왜 또 밥을 저렇게나 안 먹지?
식사는 그렇게 파했다. 훈육이 뒤엉킨 시간이니 썩 유쾌할 리 없었다. 자리를 치우다 아내가 조심스레 귀띔해준다.
“당근이, 냉동고에 조금 오래 있긴 했어. 그걸 볶으니까 좀 무르긴 하던데…”
기가 찰 노릇이었다. 진짜 그걸 알아낸다고?
첫째는 크게 태어났다. 뱃속에서부터 잘 먹더니 나와서도 잘 먹고 잘 자랐다. 드러내 가리는 채소가 몇 있을 뿐 투정하는 일도 드물었다.
주는 대로 잘 먹으니 잘 클 수밖에. 우리는 드디어 불란서 아이처럼 혼자 식탁에서 잘 먹는 아이를 키워냈고 뿌듯함과 동시에 자만심에 휩싸였다. 흥! 대체 안 먹는 아이들은 뭐람? 부모가 어쨌길래 밥을 안 먹고 돌아다니는 거야?
오만방자한 콧대를 꺾으시려 했는지, 가혹하게도 신께서는 둘째를 보내주셨다. 똑같이 키웠는데, 이번에는 밥 잘 먹는 아이 키우는 데 실패했다. 절대 우리가 잘한 게 아니었다.
처음엔 꽤 혼란스러웠다. 줄곧 먹는 걸 즐기고 꼬박꼬박 다 먹는 것만 보다가 선호하는 것도 남기는 걸 경험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따져봐도 뱃속에서 줄인 거야 과일 정도지 오히려 둘째라 가리는 것 없이 더 잘 먹었다. 나온 후에도 누나 덕에 일찍이 세속의 음식에 눈을 떴고 더 맛나고 자극적인 것에 빨리 노출됐다. 우리는 똑같이 키웠다. 첫째가 워낙 잘 먹으니 식탁에서도 둘째에게 더 신경 썼다.
그런데, 통 안 먹었다. 음식에 대한 흥미가 없었고 양도 적었다. 윽박질러도 보고 달래 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냥 뱃구레 자체가 작은 아이였다. 수도 없는 푸닥거리 끝에서야 겨우 이 아이의 ‘다름’을 인정했다. 설사 같은 배에서 나고 같은 환경에서 자라도 얼마든 다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를 애가 둘이 되고서 한참 뒤에야 깨달은 셈이다.
모든 걸 통달한 시점에서 가지는 회상이라면 좋으련만, 저 ‘당근 사건’이 불과 오래 지나지 않은 일이다. 이게 사람 미치게 만드는 게 똑같은 메뉴를 일주일 전에는 잘 먹고는 오늘은 안 먹는다는 거다. 거절의 이유는 늘 존재한다. 나름 아주 미세한 무언가를 감지하고서는 끄집어내는 거다. 이를테면 당근의 식감, 혹은 빵의 푸석함 따위의, 지극히 꼰대처럼 얘기하면 겨우 그딴 문제 때문이냐고 치부해 버릴 아주 미세한 차이들 말이다. 같은 조리 방식이라 하더라도 간이라든가 들어간 재료의 변화에 따라 식사량이 바뀌니 키우는 우리로선 곤란하기 짝이 없다. 대단하신 음식 평론가를 모시고 사는 기분이다.
아주 좋게 본다면 훌륭한 미각의 소유자로 여길 수도 있다. 실제로 얘기를 전해 들은 친구도 그런 쪽으로 키워보라고 눈을 반짝였다. 다 썩어들어가는 부모 속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겨우 꼬마 녀석이 마냥 맛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칭송하기에는 외적 요인들이 너무 많다. 팔불출 짓을 하려 해도, 아닌 건 아닌 거다. 그는 단지 지나치게 예민하다. 재능이고 뭐고 당장에 가장 속상한 건, 잘 안 먹으니 애가 작다. 자기가 좋아했던 유치원의 여자 친구는 자기보다 머리 반 개는 더 있었다. 아니, 졸업 앨범을 봐도 그 반을 통틀어 아들보다 작은 아이라고는 한 명밖에 없었으니 그나마 젤 작은 게 아니란 것 말곤 위안 삼을 것도 없다. 놀이터에서 동갑인 줄 알았던 아이가 심지어 두 살이나 어린 동생이었다는 일상 속의 반전을 이제 더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
문제의 ‘당근 사건’ 이후 서로 합의가 도출되었다. 아이가 지켜야 할 건 그간의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기 몫을 군소리 없이 먹고, 음식 갖고 장난하지 않기, 정 못 먹겠으면 불필요한 핑계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하기.
한동안 성적이 썩 나쁘지 않았다.
마침 갖고 싶은 걸 걸어서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다기엔 처음도 아닌데 꽤 진득하니 약속을 지켰다. 이번엔 그만큼 간절하게 필요한 건지, 그 며칠 새 철이 든 건지. 하여튼 응원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어쩌면 이번 시험의 성공은 아들 본인보다도 내가 더 원할지도 모르겠다. 나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좀 그만하고 싶다.
문득 첫째를 키우며 했던 건방진 말과 행동에 대한 대가를 이제야 톡톡히 치르는 건가 자문하게 된다.
제발, 잘못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반성하고 있으니 이 벌을 거둬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