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차차 육아 육아 #14
우리가 아들을 은연중에 멍멍이와 비교하는 건 아마도 곰살맞기 그지없는 그의 다정함 때문이다. 실제로도 우리가 반려견의 몫으로 기대하는 사랑과 위로까지 제가 다 주니까, 영 틀린 말은 아니다. 녀석은 우리에게만 그러는 건 아닌지 애교가 많다는 말도 자주 듣고 어디서든 쉽게 이쁨받는다. 간혹 혼이 나더라도 남자아이 특유의 흥분 기재가 과하게 발동할 때나, 예의 식탁에서의 문제 정도지, 사실 그마저도 객관적으로 따져 보면 입댈 거리까진 안 된다.
그런데, 자라면서 나한테 참 많이 혼났다. 이유는 다양했지만 사실상 하나의 문제였다. 아빠가 모자란 게 원인이었다. 나는 크고 많은 아이의 장점을 보기보다 몇 가지 단점에 집착하고 그걸 버릇 고쳐먹겠다고 난리를 피워댔다.
아무래도 가장 심각하게 부딪힌 건, 앞서 말한 적도 있는 아이의 섭식과 관련된 문제였다. 시간만이 해결할 거라고 알고 있었지만, 못 돼먹은 성격은 그런 이성적인 이해를 따라가지 못했다.
극에 달한 게 몇 해 전 여름이었다. 어른도 입맛이 없는데 원래 입이 짧은 아이야 오죽할까. 며칠을 곡기를 끊다시피 먹는 둥 마는 둥 하자, 어른은 조바심에 다시 걱정 인형이 돼 버렸다. 가뜩이나 작은데 저러면 어쩌나. 혼이 나서 눈치를 보느라 본래 양보다도 더 못 먹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속 좁은 아빠는 그만 자기감정의 늪에 빠져 아이를 용납하지 않았고, 점점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그즈음 유치원에서 어린이 장터를 열었다. 원에서 받은 칭찬 점수를 화폐처럼 쓸 수 있는 행사였는데 당연히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이며 간식거리가 잔뜩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자기 장난감으로 다 소진하지 않고 엄마와 누나 꺼, 그리고 자길 들볶는 아빠 몫까지 나눴다. 마치 부족한 아빠를 이해한다는 듯 먼저 화해의 손길을 건넨 것이다. 키위를 좋아하는 아빠의 취향까지 고려해서.
그 날 퇴근 후 아내가 사연과 함께 준 작은 키위 한 알은, 그저 먹먹했다. 내 치부가 온 천하에 드러나는 것 같아 얼굴이 마구 화끈거렸다.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과일을 쳐다만 봤다. 달리 할 말도 없었다. 그냥 안아만 줬다. 어떻게 해야 할지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깟 밥을 좀 잘 안 먹으면 어떤가. 우리가 가르친다고 되지 않을 따스한 마음을 가진 아인데. 아빠라는 인간이, 중요한 걸 놓치고 자기 가치 기준에 맞춰 아이를 괴롭힌 그릇된 양육자에 불과했던 거였다.
여전히 거슬리는 건 있다. 사내아이를 엄하게 키워야 한다는 잘못된 강박 관념이 여전히 아이를 압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스스로 억누르려 애를 쓴다. 이미 충분히 잘 자라고 있으니까. 겨우 나 따위의 하찮은 철학이 아닌 아이의 성품을 기반으로 자라나는 거니까. 너무 어긋날 적에만 적당히 붙잡아주는 것만 해도 내 역할은 충분하다.
언젠가 아이가 글을 깨치고서 엄마와 나눈 대화로 글을 맺을까 한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나 달콤하다고, 이 귀한 애를 어리석은 아빠가 괴롭혔다고 자백하는 창피한 자랑이다.
퇴근 후 저녁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엄마를 아들이 불렀다.
“엄마, 오늘 아침밥 먹었어?”
“아침에 엄마가 빵 줬잖아.”
“아니, 나 말구 엄마가 먹었냐고.”
“아, 엄마는 아침에 급히 가느라 못 먹었어.”
어딘가를 응시하던 그가 달콤하게 말했다.
“엄마, 아무리 바빠도 아침밥은 꼭 챙겨 먹으래.”
놀란 아내가 하던 걸 멈추고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냐고 물었다.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해맑게 답했다.
“저기. 이마트 봉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