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차차 육아 육아 # 21
어떤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우리는 때때로 가지 않은 길을 가정하며 살아간다. 돌이키는 감정이 안도하는 마음이든, 혹은 후회로 가득 차 있든.
나는 ‘결혼’에 있어서는 다른 가정을 해 본 적이 없다. 아내가 이 글을 보고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항상 주변에 강조하지만, 나 같은 성격파탄자를 데리고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이런 훌륭한 아내와 사는 건 혹시 전생에 나라를 구한 덕을 쌓은 게 아닌가 하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다시 한번 이 글을 보는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반면에 ‘출산’의 경우는, 의미가 없는 가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몇 번인가 고민해 본 적이 있다. 어딘가 삶이 쪼들리거나 원하는 걸 마음껏 할 수 없을 때면 어느새 자유롭던 그 시절을 떠올리는 거다. 당장 둘이라면 얼마든지 즉흥적인 것, 일례로 티브이에 나온 맛집이 너무 궁금하면 무작정 떠나는 게 가능한 거다. 진지하게 다음 날 출근이며 코로나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아이가 있다면 벌써 애들 짐 싸다 말고 포기할 상황이니까.
따져 보면 당연히, 겨우 맛집 따위 마음껏 갈 자유와 바꾸기엔 너무도 소중한 아이들이니까 저 가정도 그다지 영양가는 없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얻은 게 훨씬 더 많은 두 녀석이라 더 생각할 것도 없다.
그런데 가정하는 주체를 바꾸면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아내와 나의 만족도는 차치하고서, 아이들의 만족도를 생각하면 이 선택이 과연 옳은가 하는 의구심은 더욱더 커진다. 그것도 하나도 아닌 둘을, 정작 당사자와는 합의도 없이 저질렀으니 이제라도 ‘고객 만족도 조사’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아이들이 먼저 드러내 아쉬움을 표현한 적이 없다. 아직 어려서일 수도 있지만, 워낙 착한 아이들이니까 그럴 거다. 다만 내가 괜스레 미안하고 안타깝다. 형편이 차고 넘치지 않다 보니 마냥 모든 걸 다 해줄 수 없는 게 때때로 참 속상하다. 그게 혹시나 얼마 되지 않은 걸 나눠서 더 부족해질까 마음이 아플 뿐이다. 원치도 않은 동생이 생기고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나눔을 강요받은 첫째에게도, 누나만큼 집중해서 신경 쓰지 못한 둘째에게도 모두 미안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체력과 시간, 재화의 한계는 있으니 분산되고 나뉠 수밖에 없었다. 둘 중 누가 됐든 혼자 컸으면 엄마 아빠가 빚을 내가며 광나게 키웠을 건데.
당연히 아내에게도 미안하다. 언젠가 그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둘째를 낳으니까 첫째가 너무 불쌍했어. 그런데 둘째가 크니까 첫째 때만큼 못 해줘서 둘째가 불쌍하더라고.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알아? 내가 제일 불쌍해.”
그렇다. 그녀 또한 고통받는 피해자 중 하나였다.
특히나 이런 생각은 어딘가 더 호사스러워 보이는 외동아이들을 볼 때 더 증폭된다. 편견일지 모르나 어딘가 모든 지원이 집중된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게 가득 느껴지고, 그럴 때면 가지 않은 길의 무언가가 내 마음속에 고개를 쏙 내민다. 둘이 아니라 하나였더라면 아이가 더 행복했을까? 아내도 덜 힘들었겠지? 모두가 더 안락하고 풍족했을까? 의문은 연달아 계속되고, 급기야 아주 곤란한 질문에 다다른다.
좋아! 그렇다면, 둘 중 누구를 고르지?
애초에 무의미한 망상이다. 하다못해 일말의 생산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민에 불과하다. 돌이킬 수도 없는 걸 머리 싸매고 고민하면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이미 둘이 됐고, 둘 다 너무 이쁜데, 나누는 게 문제라면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나눌 걸 크게 부풀리면 되는 거다. 결국, 모든 가정이 의미가 있으려면 경제적 주체인 내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간단한 결론에 도달한다. 선택했으니 그에 대해서 책임지고 최선을 다해야겠지.
정 애가 둘이라 나누는 게 문제라면 그 몫을 키울 수밖에.
그래서 남편이자 아빠는 오늘도 밤늦은 시간까지 손님들에게 고개를 조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