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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미 Jul 16. 2020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

『조금만 기다려 봐』

* 『조금만 기다려 봐』(2016)

- 글, 그림: 케빈 헹크스 옮김: 문혜진(비룡소)



이 그림책은 창틀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다.


창틀 위에 있는 장식품 같은 인형들이 창문 밖의 세상을 동경하면서 각자만의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날 등장한 고양이 인형으로 인해 이들은 ‘각자의 기다림’에서 ‘함께 하는 기다림’으로 바뀌게 되었다. 달, 비, 바람, 눈 등 명확히 자신이 원하던 것을 기다렸던 그들이 재미있고 행복한 일이 일어나기를 함께 기다리게 되었다.




『조금만 기다려 봐』는 WAITING을 한국어로 번역한 그림책이다. 번역가가 원서의 글뿐만 아니라 그림에 대한 해석도 잘 반영해 놓은 것 같다. 그래서 한국어 번역서에는 친절함이 더해져서 작품을 이해하는데 좀 더 편리한 면도 있고, 번역가의 작품 해석을 따라가게 만드는 면이 있기도 하다.


먼저, 『조금만 기다려 봐』와 WAITING의 차이점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번역서는 등장인물의 특징을 등장인물의 명칭에 이미 설명해 주었다. 원서에 있는 ‘pig,’ ‘owl,’ ‘bear,’ ‘rabbit’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반해, 번역서에는 ‘점박이 올빼미,’ ‘우산 쓴 꼬마 돼지,’ ‘연을 든 아기 곰,’ ‘썰매를 탄 강아지,’ ‘별 토끼’라는 표현으로 등장인물이 구체화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이 각각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예상할 수 있다.


점박이 올빼미는 밤에 뜨는 달을 기다리고, 우산 쓴 돼지는 비를 기다리고, 연을 든 아기 곰은 바람을 기다리고, 썰매 탄 강아지는 함박눈을 기다린다. 이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이 헤쳐 나갈 수 있는 상황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것은 위기 상황에서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할 수도 있고, 기다리지 않던 다른 상황에서 자신이 대처할 수 없는 두려움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모습이 우리들과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도 힘든 상황에서 그것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있기를 바란다.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기를 바라고,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눈이 와도 그것을 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상할 수도 없고, 대처할 수도 없는 상황을 기다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별 토끼처럼 특별히 기다리는 것 없이 창문 밖에서 보여주는 것들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기다림 자체를 즐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둘째, 문자 텍스트를 그림 텍스트처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둥실,’ ‘주룩주룩,’ ‘살랑살랑,’ ‘펑펑’의 문자의 배열이 다른 문자들과 동일하지 않다. 한 글자 다음의 글자는 반 칸 정도 내려가 있고, 그다음 글자는 원래 칸에 쓰여 있고, 다음 글자는 또 반 칸 정도 내려가 있다. 글자가 피아노를 치듯이 반음이 오르락내리락 배열되어 있어 리듬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단어 자체가 주는 느낌이 피부로 느껴지듯이 전해지는 것 같다.


또, 인형들이 창문 밖에서 자신들이 기다렸던 상황이 이루어질 때 매우 기뻐했을 것도 느껴졌다. 실제 창문 밖이 밤이 되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눈이 온다고 해도 창문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은 기다림 끝에 찾아온 상황이기 때문에 그 기쁨이 매우 컸을 것이다.


셋째, 번역서에는 원서에 없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번역서에서는 의태어와 의성어를 사용하고 있다. ‘둥실,’ ‘주룩주룩,’ ‘살랑살랑,’ ‘펑펑,’ ‘훌쩍,’ ‘짠!’ 등과 같은 표현은 그림을 보지 않아도 등장인물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그 상황의 느낌이 전해진다. 그리고 이 표현들이 그림과 같이 어우러지면 그 모습과 소리가 보이고 들리는 듯하다.


번역서에 등장한 ‘코끼리 아저씨’는 원서에서 ‘visitor’라고 표현되어 있다. 원서에는 ‘그가 잠깐 머물렀었다’라고 쓰인 상황이 번역서에는 ‘코끼리 아저씨가 찾아와서 동물 친구들이 행복했다’고 했다. 코끼리 아저씨가 등장한 장면에서 창틀에 있던 인형들이 모두 환하게 웃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의 시선이 모두 코끼리 아저씨를 향해 있었다. 아마도 이들은 코끼리 아저씨의 등장이 반가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코끼리 아저씨를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점박이 올빼미와 별 토끼가 슬퍼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물론 원서의 그림과 번역서의 그림은 동일하다. 태국 시장에서 기념품으로 사 왔을 뻔한 화려한 장식을 한 코끼리 인형이 창가 끝에 있다가 결국 깨지고 만다.

 

이 코끼리 인형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화려한 장식을 하고 단단한 소재로 만들어진 이 코끼리 인형은 자신의 틀에만 갇혀 있고, 융통성 없는 사람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화려함으로 치장되어 있지만 속은 비어 있고, 결국 위태로움을 버텨내지 못하고 부서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이 그림책이 우리에게 하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 그림책의 이야기가 전환되는 것은 고양이 인형이 등장하면서이다. 별 토끼처럼 고양이도 특별히 무언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리고 번역서에도 고양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수식어도 붙여 놓지 않았다.


고양이가 창밖을 내다보는 장면의 다음 장면에는 “어머! 깜짝이야!”라고 소리치는 사이로, 고양이 인형 다섯 개가 나열되어 있다. 이 고양이 인형은 큰 인형 안에 작은 인형이 여러 개 들어 있는 러시아의 전통인형 마트료시카였다. 나는 그 한 장을 넘기는 사이에 ‘It’s me!’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그림책에서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등장인물은 별 토끼와 고양이 인형이다. 별 토끼는 몸이 스프링처럼 접혀 있어서 움직일 수 있다. 코끼리 아저씨가 창틀에서 떨어졌을 때도 별 토끼는 자신의 몸을 구부려 부서진 코끼리 아저씨의 잔해를 보았다. 별 토끼는 보여주는 장면뿐 아니라, 자신이 움직이면, 자기가 보고 싶은 장면을 볼 수도 있는 인형이다.


고양이 인형은 이미 자기 안에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다양한 모습일 수도 있고,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친구들일 수도 있다. 고양이 인형은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이미 알고 있고, 외롭지도 않은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뿐 아니라, 이들은 어느 상황에서든지 자신이 의미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에 맞는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상황의 즐거움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함께 있어도 외로운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무엇인가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혼자 있어도 무엇인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창틀 위의 열 개의 인형들은 색색의 나비들이 꽃이 핀 나뭇가지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모습을 함께 보면서 재미있고, 행복한 일을 기다린다.


우리는 합격 소식, 승진 소식, 월급이 올랐다는 소식, 집을 샀다는 소식, 개업을 했다는 소식, 건강이 좋아졌다는 소식, 상품이 도착했다는 소식, 내가 기다리던 물건의 할인 소식, 테러가 없어졌다는 소식, 전염병이 사라졌다는 소식, 자연이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 우주에 갈 수 있다는 소식 등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수많은 소식들을 매일매일 기다린다. 그리고 이 즐거운 소식을 들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함께 기뻐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즐거운 소식을 듣고 살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한다. 하지만 자신이 결과를 결정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 결정된 결과를 받아들여야 되는 입장이다. 창문 밖의 세상을 그저 바라보면서 행복한 순간을 느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다.


기다림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기다림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는 자신의 몫이다. 내가 기다리는 상황이 아닌 것에 힘들어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믿고, 같은 곳을 바라봐 줄 친구와 함께 할 때, 기다림 자체가 의미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책은 '친구들과 함께 조금만 기다려 봐, 그러면 즐거운 일, 행복한 일은 언젠가는 올 거야'라고 우리를 다독여 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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