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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미 Oct 18. 2024

(인정의 단계)‘착함의 무게’

: 금이 난 머리

글/ 조리 존, 그림/ 피트 오즈월드, 옮김/ 김경희,『착한 달걀』(길벗어린이, 2022)               




착하게 태어난 달걀이 있다.     



나무 위에 올라간 고양이를 구해주고, 누군가의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어주고, 누군가의 마른 화분에 물을 주고, 누군가의 구멍 난 타이어도 바꿔주고, 누군가의 낡은 집에 쓱쓱 페인트칠을 해주었다.



착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기꺼이 써서 남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어쩐지 착한 달걀의 도움을 받은 이들의 표정은 그리 달가워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착한 달걀은 주변의 상황과 남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 그림에서 여실히 보이기 때문이다.



양계장에서 태어난 착한 달걀은 태어나자마자 마트로 보내졌다. 착한 달걀은 열두 개 들이 달걀 상자에 한자리를 차지하면서 자신과는 너무 다른 11개의 달걀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특징으로 달걀마다 이름을 지어주었다. 반면, 자신의 이름은 짓지 않았다.      



11개의 다른 달걀들은 잠자는 시간을 지키지 않았고, 달달한 시리얼만 좋아했고, 자주 짜증을 부렸고, 이유 없이 엉엉 울고, 물건을 일부러 부쉈다.


     

착한 달걀은 이런 문제를 만드는 다른 달걀들 앞에 친구들의 잘못을 바로잡고, 모범이 되려고 노력을 했다. 착한 달걀은 이들을 만나면서 더욱더 착한 달걀이 되고 말았다.



착한 달걀은 자신이 가진 기질을 이들에게 어떻게 적절하게 표현하고, 이들과 어떤 방법으로 어울려야 하는지 전혀 배운 적이 없었다. 아무도 착한 달걀에게 다른 달걀들과 소통하고 다른 달걀들을 이해하는 사회성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착한 달걀의 노력은 허사였다. 어떤 달걀도 착한 달걀의 지적에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이 달걀들은 나쁜 달걀들일까?



좀 늦게 자고, 달달한 시리얼을 좀 먹고, 짜증을 부리기도 하고, 감동을 받으면 울 수도 있고, 물건을 부술 수도 있다. 착한 달걀과 함께 놀고 싶은 마음을 괴롭히는 것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잘못이 없다거나 좋은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쁘다’라는 말로 평가되어 잘못된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진심이 서로 소통되지 않은 것에 따라 보이는 부분을 자신의 기준 안에서 평가해서 선입견을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착한 달걀은 다른 달걀들을 나쁘게 바라보고 고치려고만 하다가 지쳐 버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껍질에 금이 나 있었다.



착한 달걀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성품대로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착한 달걀은 ‘착하다’는 것이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정해진 규칙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나 다른 사람들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부족했던 것 같다.



의사 선생님은 착한 달걀이 너무 부담이 많아서 병이 났다고 했다. 착한 달걀이 가지고 있는 부담은 모든 달걀들이 자신처럼 착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착한 달걀은 그날로 마트를 떠났다. 처음에는 외로웠지만, 이발도 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로 하고 나니 마음의 색깔이 달라져 있었다.





척한 달걀은 혼자서 이곳저곳을 여행을 다녔다. 산책도 하고, 독서도 하고, 일기도 쓰고, 고요하게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모든 시간을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서 썼다.



착한 달걀이 자신을 돌보면서 생각을 많이 정리하고, 다시 11명의 친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마트 안의 달걀값이 떨어질 만큼 시간이 흘렀다.



착한 달걀의 친구들은 돌아온 착한 달걀을 환영했다. 착한 달걀이 떠나고 자신들의 행동을 반성하고 후회하지 않았을까? 이들이 착한 달걀을 그리워하면서 착한 달걀처럼 이들도 착하게 변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착한 달걀이 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이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착한 달걀이었다. 착한 것이 완벽한 것이고, 그래서 완벽을 유지하려던 착한 달걀은 이제 그것이 별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함께 어울려 재미있게 노는 것이 자신만의 완벽한 성에 갇혀 있는 것보다 훨씬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 같다.



착한 달걀은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이전에 자신은 친구들과 소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모두 잘못했고, 자신이 모두 옳았던 것이 아니었다. 착한 달걀은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온 것이다.      


              

착한 달걀 머리 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착한 것만이 완벽하고, 좋은 것은 아니다. 타고난 기질이 아무리 착하다고 할지라도 모든 순간에 착할 수는 없다. 자신을 주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어울리게 만들 줄 알아야 하는 것 같다.      



착함의 무게는 머리를 깨지게 한다. 그 무게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준을 먼저 내려놔야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자존감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먼저 자신의 한계치를 알아야 하고, 주변과 소통하는 방법도 배워야 하는 것 같다. 그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지키는 힘이 자라나고 그것을 자존감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는 방패가 되기도 하고, 주변과 소통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착하기만 한 것은 완벽한 삶을 만들 수 있는 없다. 그리고 착한 달걀이 추구했던 완벽한 삶을 만들어야만 하는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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